조선의 역사적 소묘

2013. 6. 25. 16:49사는 이야기

최근 한국역사서로는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본 이후,
아래의 긴 조선 역사를 오랜만에 읽었다.
출처를 잘 알 수 없는 서양인이 쓴 것 같은 조선의 역사....

근대까지의 조선의 역사는 한마디로 조공을 바치며 전쟁의 폭풍우에 휘말린 가련한 나라로 서술되어지고 있다.

'침략자들은 약탈과 만행을 일삼았고, 그 결과 조선백성들은 폭풍우 앞에 서있는 나무들처럼 그들에기 짓밟히곤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조선인들은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시 일어섰고, 일정기간 동안 조공국가로서 약속된 공물을 승전국에 바치곤 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전쟁의 상흔을 잊을 때가 되면 또 다른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들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
제2자의 눈에 비춰진 역사라는 것이 이런 것이고,
또 이것이 하나의 사료로 남는다면 참 가련한 기록이다.

기자 조선(고조선)의 정리되지 않은 역사도 유유하게 설명하고, 
고구려의 기상과 백제의 해안시대와 신라의 찬란한 문화도 다 우리 민족의 유산을 나타내지도 못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역사...
태백산맥의 기상도 없으며, 거북선의 통쾌한 승전도 없고, 한글 창제 위대함도 찾을 수 없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에게는 어떤 도전과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않할 수야 않할 수 없다.

강대국의 틈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우리나라 역사를 기억하시고,
앞으로 작지만 용감한 이 나라 이 민족, 이 백성을 기억해 주셔서
이젠 복음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기이한 빛의 덕을 선전하는 나라로 서게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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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속과 선교 - Daniel Lyman Gifford, 심현녀>

역사적 소묘 중에서... (추정)


조선의 역사적 소묘

그리스의 역사가 신들 간의 사랑과 미움으로 뒤엉키면서 시작되고, 영국의 역사가 아더왕의 신비로운 전설로 그 시작을 알릴 때, 조선의 역사도 그 고유의 신화적 전통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북쪽 국경지방의 위치한 백두산은 언제나 신비에 쌓여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반도의 조상들은 한동안 통치자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백두산 신단수 아래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백성들은 그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 단군 혹은 ‘신단태자’라 불렀다. 단군은 평양에다 왕궁을 짓고 1000년 동안 한반도를 다스렸으며, 오늘날까지도 평양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원이 남아있다. 단군의 후손들도 그후 1000년 동안이나 더 한반도를 다스리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이나 조선의 일부 사가들은 더 확실한 근거가 있는 한 인물, 즉 중국 귀족 출신의 ‘기자’라는 사람이 조선 고대국가의 창시자라고 주장한다. 기자는 ‘중국의 네로’라고 불리는 사악한 왕이 주나라를 다스렸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는 사악한 왕실에 애국적인 자문을 해주는 3명의 고문관 중의 하나로 선택되는 운명을 맞았다. 결국 3명의 고문관 중 1명은 암살되고 또 1명은 도망가고, 나머지 1명 즉 기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후 한 혁명가가 주나라를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그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 새로운 왕은 기자를 기꺼이 가장 높은 관직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자는 영국의 윌리엄 3세(1689-1702녀녀 재임)가 영국을 통치하던 시대에 살았던 한 수도원장이 왕실에 대한 복종 서약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양심의 고통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자는 암살당한 주왕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위 찬탈자라고 볼 수밖에 없는 현재의 왕이 내리는 관직을 받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여기서 ‘임금이 갖는 성스러운 권리’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된다. 이렇게 해서 기자는 B.C. 1122년 스스로 한반도에 망명을 하여 조선 민족들 사이에 정착을 한 것이다. 이때 아시아 대륙의 또 다른 한쪽 rmxdptjsms 사무엘이 아직도 재판관으로 유대민족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기자는 자신의 나라를 조선이라 이름지었으며, 그 이름이 아직도 한반도의 국명이 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기자는 신화적 인물인 단군에 의해 창건된 나라를 정열적으로 다스려 나가면서 그가 중국에서 익혔던 문물을 조선에 퍼뜨렸다. 그의 통치영역은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쪽과 랴오허강 이남의 만주지방을 망라했다. 평양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하며, 한반도의 가장 큰 2개의 도시-북쪽의 평양과 남쪽의 전주-에서 나는 기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커다란 사원을 본 적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이 되어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치했다고 한다.

그후 역사를 주관하는 여신은 아주 오랜기간 동안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기원 전 약 200년이 되어서야 역사적 기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B.C. 200년 이후의 조선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의 고대 역사에 관해 나는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대로 중요한 사건과 변화의 개요만을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이같은 역사적 설명을 위해 그리피스(W. E. Griffis)박사의 위대한 저술인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을 많이 참조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 역사책에는 고대로부터 약 15년 전 조선과 서방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될 때까지의 조선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동쪽, 서쪽, 북쪽에 각각 호전적인 나라들에 둘러싸인 조선의 역사는 중국, 몽고,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의 연속이었다. 침략자들은 약탈과 만행을 일삼았고, 그 결과 조선백성들은 폭풍우 앞에 서있는 나무들처럼 그들에기 짓밟히곤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조선인들은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시 일어섰고, 일정기간 동안 조공국가로서 약속된 공물을 승전국에 바치곤 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전쟁의 상흔을 잊을 때가 되면 또 다른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들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조선인은 외국과의 대접전에서 용맹을 떨치며 승리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비정규전에서는 요새 주둔군의 용맹성에 힘입어 성공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B.C 107년 동안 이곳은 한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윽고 한반도의 북쪽지방의 운명을 훨씬 더 북쪽에 위치한 부여족의 남하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부여족은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지방에 살고 있는 민족이었다.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종족들과 비교해서 이 종족은 발달된 동질의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부여족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우니 그 중심되는 활동영역이 두만강 상류의 북서쪽에서부터 백두산까지 이르렀다. A.D. 70년 경에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북쪽지방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 요동지방을 포함한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ᄄᅠᆯ치고 있던 중국을 물리치고 명실공히 고구려라는 국가로서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고구려는 7세기까지 중국과 산발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왜냐하면 중국은 자신들의 땅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고구려가 항상 눈의 가시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중국은 두 번에 걸쳐 대규모의 침략군을 고구려에 보낸 적은 있지만, 이 동이족을 명망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자, 이제부터는 대동강 남쪽의 모든 지역을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자. B.C. 107년 고조선이 중국에 흡수될 때, 한반도 남부지방은 지리적으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서쪽의 마한, 남쪽의 변한, 그리고 동쪽의 진한이었다. 이 3개의 부족국가 원주민들은 같은 종교와 낮은 수준이나마 동질의 문명을 소유한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진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수준 높은 문명을 소유한 민족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방책(防柵)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살았고, 이미 비단 짜는 기술과 제련술을 익힌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진한에서는 A.D. 1세기에 장인들과 미술가들의 작품을 일본의 황실(Midado)에 보냈다고 한다. 이 작품들은 그 당시 섬나라 일본에서 생산되는 어떤 것들보다 훨씬 우수한 예술품이었다고 한다. 이 발달된 기예의 비법은 아마도 중국에서 건너온 망명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삼한지방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변화를 언급해야겠다. 중국의 침입으로 쫓겨난 고조선의 준왕은 남쪽으로 도망쳐 마한 땅에 정착하였다. 조선인은 이 마한을 후에 백제라 불렀고, 일본인은 햐쿠사이(Hiaksai)왕국이라 불렀다. 한편 진한은 신라왕국이 되었다.

부족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이윽고 한반도의 지도가 다음과 같이 변하게 되었다. 즉 3개의 왕국 -북쪽의 고구려, 남동쪽의 신라, 남서쪽의 백제- 이 한반도에 등장하여 바야흐로 삼국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A.D. 374년 공자와 맹자의 중국 고전이 처음으로 한반도 백제 땅에 들어왔다. 10년 후 불교가 백제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어서 5세기 경에 백제 사람들은 중국으로부터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중국 황제로부터 실제적인 독립국가임을 인정받았다. 660년 경 삼국간의 내전이 한창일 때 신라는 중국(당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백제군을 물리쳤으며, 그 결과 백제는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다시 궐기하여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은 원정군을 보냈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참패했으며, 그 결과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A.D. 700년 경 백제의 많은 유민이 불교서적과 중국 성현들의 고전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이제 다시 북쪽의 고구려 왕국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고구려의 정치형태는 임금과 거의 같은 권력을 누리는 귀족들이 존재하는 봉건국가이다. 641년 이 귀족들 중 한사람이 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중국 황제는 이 새로운 왕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에게 중국의 동맹국인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구려 왕은 이를 거절했다. 중국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대규모의 침략군을 보내왔다. 안주시(안시성)의 훌륭한 방어전에서 고구려 군대는 중국 군대가 식량부족으로 철수를 해야만 할 때까지 굳건히 자신들의 성을 지킬 수 있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운명처럼 후퇴하는 수천 명의 중국군은 혹독한 추위에 얼어죽고 말았다. 그러나 664년 중국은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여 전투를 승리고 이끌었으며, 그 결과 고구려 왕국은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신라왕국으로 눈을 돌릴 차례다. 신라왕국과 일본의 첫 충돌은 나가사키시가 위치해 있는 규슈섬의 소유권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신라의 정착민들은 그 섬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는데, 교토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야마토 종족은 이에 항희하고 나선 것이다. 그 결과 A.D. 200년 신공왕후(神功王后)의 통치아래 있던 일본은 소위 말하는 규규 ‘반란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을 나섰다. 여왕은 문제의 발단이 한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신하고 군대를 한반도로 향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신라군이 어떤 저항도 받지않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풍부한 공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이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이 되었다는 중국의 주장과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신라군과 백제, 고구려 연합군 사이의 간헐적인 충돌은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때마다 일본은 백제를 돕고, 중국은 신라와 연합하고, 한반도 북쪽의 소수민족들은 고구려를 돕곤 했다. 불교는 528년 신라에 소개되어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가장 우세한 종교로 발전해 갔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신라의 유능한 한 학자는 훌륭한 모국가 자모를 창안해 냈다. 수도인 경주는 화려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는 도시로 발전했고,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명성이 한반도는 물론 일본 왕실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신라는 한반도 동부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며, 삼국 중 맨 마지막까지 존립한 왕국으로서 934년 고려에 멸망하였다.

고려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몇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즉 9세기 경 많은 수의 유랑민들이 두만강 북쪽으로부터 한반도 북부지방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곧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912년 이들 중에 궁예라는 승려가 많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궁예는 암살되고 그의 부하이자 고구려 왕족의 후손인 왕건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내란이 한창이었고, 통일 신라는 점점 국력이 쇠약해져 갔다. 왕건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으며 몇 년 지나지 않아 여유 있게 한반도를 그의 세력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왕건은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60마일 떨어진 개성(송도)으로 수도를 옮겼다. 여기에서 왕건의 후손들은 약 400년간 한반도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 편의상 우리는 이 기간을 ‘송도왕국’ 시대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왕건은 자신의 왕국을 고려라 불렀으며 바야흐로 조선 불교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왕건의 아들과 그 후계자들은 중국에 공물을 보내며 신속하게 동맹관계를 맺고 평화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구텐베르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앞선 시대에 고려인들은 목판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기술을 익혔으며, 이 기술은 일본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동양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리는 몽고의 징기스칸이 자신의 용맹스러운 유목민 군대를 이끌고 거의 아시아 전역을 정복했을 때, 고려와 일본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1218년 고려왕은 이 위대한 몽고 황제와 군신관계를 유지할 것을 선언했다. 수년 후 한 몽고 사신이 고려 땅에서 암살되었는데, 이를 빌미로 몽고는 침략군을 보내 한반도를 분할하여 몽고 감독관들의 감시아래 다스리도록 했다. 고려인들은 과감하게 일어나 이 몽고 감시관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고려인들은 몽고의 실제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중에서 고려왕이 몽고인 대장앞에 엎드려 몽고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굴욕적인 사건이 있었다. 비록 고려인들의 항거가 끊이지 않았지만 수세기 동안 고려는 몽고의 통치아래 놓이게 되었다. 1218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의 도움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를 도와 일본을 침략하려 했다는 사실은 한반도와 섬나라 일본 사이에 존재해 왔던 증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후 200-300년 동안 일본의 중앙정부는 계속되는 내란으로 인해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으며, 따라서 일본에는 해적들이 늘어나 해상에서 조선인들의 배를 탈취하여 어부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고려와 일본사이의 악화된 감정은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1392년 이씨 왕조의 탄생을 알리는 변화가 있었다. 이씨 왕조는 비록 1864년 직계 후손이 끊어지긴 했어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왕씨 왕조(고려)는 부패할대로 부패해진 상태에서 한 폭군이 왕위에 올랐다. 무반 출신인 이성계는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이어 왕의 사위가 되었다. 고려는 얼마동안 용상 위에 앉아있는 몽고 통치자에게 공물을 보내는 것을 소홀이 하였다. 몽고는 다시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군대는 이같은 몽고의 야심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새로이 명나라가 태어나 고려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고려왕은 백성들의 요구에 반하여 명나라에 공물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다. 고려의 중신들이 명나라 장군들에게 압도당하려 할 때, 이성계는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잡았다.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조선)를 세웠으며 수도를 현재의 서울로 옮겼다. 명나라 복장과 상투트는 풍습이 이때 조선으로 유입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으로 각각 공물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으로 보내는 공물은 얼마 후에 중단되었다. 일본 해적들은 아직도 한반도 해안을 침범하며 어부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 내륙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백성들은 상업에 종사하고 농사를 지었다. 문관이나 무관에 속하는 양반들은 풍류를 즐기며 지난날의 전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름날에 즐기는 휴가처럼 세월은 한가로이 흘러 이윽고 16세기말이 되었다. 이때 일본은 두 번에 걸쳐 한반도를 잔인하게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폭풍우가 몰고 오는 거대한 파도처럼 죽음과 폐허를 남기고 한반도를 휩쓸었으며, 조선인들에게 잔인한 전쟁의 상처를 남겨주었다.

1585년 거의 2세기 동안 무정부 상태에서 혼란을 거듭한 일본에 히데요시라는 장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정복자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황실의 봉건정책 아래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막강한 힘으로 정복할 새로운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책이 그에게 주어졌다. 히데요시는 일본의 조공국가인 조선이 사신과 함께 공물을 보내지 않고 있음에 분개했다. 그는 늙은 병사 한 사람을 사신으로 조선에 보내서, 왜 최근에는 공물을 바치지 않느냐고 따졌다. 조선으로부터의 대답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더구나 그 늙은 사신은 돌아가는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두 번째 사신을 보냈을 때는 첫 번째보다 약간 성공적이었다. 조선의 사절단이 공물을 가지고 일본을 방문했다. 사절단은 오랜 기다림 끝에 히데요시와 면담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히데요시는 많은 선물과 함께 그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선의 왕에게 보내는 히데요시의 무례한 회신이 담겨 있었따. 히데요시는 조선의 대신들에게 일본이 중국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의 해적들이 중국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선으로부터의 대답은 히데요시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중국의 콧대를 꺾기로 했으며, 동시에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심했다. 이때가 1592년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히데요시의 군대는 그 수가 엄청났으며 식량도 충분히 갖추었고 화승총으로 무장한 군대도 있었다. 화승총은 그 당시 동양에 처음으로 소개된 무기였다. 2명의 장군이 총 병력을 지휘하였는데, 그 하나는 가톨릭 신자이자 충동적인 성격의 젊은 장수 고니시와 다른 하나는 열렬한 불교신자이자 싸움군인 늙은 장수 가토였다.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장수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심하게 질투하였다. 고니시가 먼저 부산에 상륙하였다. 부산 가까이에 있는 동래성이 곧 무너졌다. 그는 즉시 한반도 북쪽으로 진격하여 낙동강을 따라 상주까지 도달하였다. 가토는 고니시보다 하루 늦게 상륙하였다. 가토는 자신의 경쟁자가 이미 상륙하여 북쪽으로 출발했음을 알고 분노했다. 그는 약간 서쪽으로 공격루트를 택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로 파견대를 보냈다. 그리고 서울이 누가 먼저 도착할 지에 대해 고니시와 경쟁을 벌였다. 한편 고니시는 경상도 상주에서 충청도 충주로 진격하여 충주시를 곧 함락시켰다. 가토도 며칠 뒤 이곳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사력을 다해 군대를 몰아 서울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두 장수는 같은 날 서울에 도착하여 서로 다른 성문을 통해 왕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은 황폐해있었다. 향락에 빠진 채 세월만 보내고 있던 왕과 그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 전쟁에 대처할 수 없음을 알고 서둘러 북쪽 평양으로 도망쳐 버렸다. 때는 우기여서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그들은 피난을 간 것이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죽을 힘을 다해 경쟁이나 하듯 산속으로 도망쳤다. 왕은 남아있는 군대를 동원하여 임진강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텅 비어있는 수도 서울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후 가토와 고니시는 군대를 연합하여 북쪽으로 출발했다. 임진강에 이르로 그들은 후퇴하는 척하며 조선군을 유인하여 무찔러 버리고 조선군의 배를 탈취하여 임진강을 건넜다. 여기서 2명의 일본 장수는 서로 간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한가지 내기를 걸고 서로 다른 길을 택하여 진군하기로 했다. 가토는 동쪽 길을 택했고 고니시는 그대로 한반도의 서쪽으로 북진을 계속했다. 고니시가 평양을 향해 행진을 하는 동안 조선의 왕은 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도망치고 있었다. 고니시는 평양수비대가 그를 향해 무리하게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 대동강 맞은 편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대동강의 여울목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본군은 즉시 그 여울을 걸어 건너서 평양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여기서 고니시는 중국을 공략하기 전에 가토의 함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가토의 함대는 결코 도착하지 않았다.

한편 몇몇 조선인은 새로운 형태의 전함(거북선)을 구상하여 만들고 있었다. 이 전함으로 그들은 일본함대를 바다로 유인하여 쳐부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군의 신속함과 승전 소식만으로 충격을 받아왔던 조선인들은 용기가 솟았다. 산동반도로 피신해 있던 조선의 왕은 중국 북경정부에 끈질기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수천명의 중국군대가 산동반도를 지나 한반도로 출정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이 평양까지 무리없이 진격해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 다음 일본군은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잠복해 있다가 중국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화가 난 북경정부는 이제 전격적인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즉시 4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시간을 벌기 위한 중국군 특유의 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편 가토와 고니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로서 조선 왕실의 왕자들을 인질로 잡아두었다. 조선에서도 게릴라 부대가 조직되고 있었다. 1593년 6만 명의 강력한 중국군 부대가 조선군대와 협력하여 평양시 북쪽 언덕에 위치한 일본군 요새를 공격했다. 이틀 동안의 공방전이었다. 마침내 고니시는 밤중에 자신의 병력을 철수하여 서울로 후퇴하였다. 여기저기 설치해 놓았던 일본군 주둔지는 조선 군대가 점령했다. 가토 역시 고니시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울로 후퇴했다. 이제 중국과 조선의 동맹군은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수백명의 민간인과 그밖의 많은 사람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며, 거의 도시 전체를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얼마후 서울 근교에서 대접전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동맹군은 패배하여 송도로 철수했다.

겨울이 왔다. 나라 전체가 기근과 역병으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겨울이 끝날 무렵 평화조약이 맺어지고 일본군은 부산으로 돌아갔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려는 일본의 야심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조선땅에서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가토에게 한반도 남쪽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진주성 전투에서 한 기생이 일본인 장수를 유인해 춤을 추다가 그 장수를 강물에 빠뜨려 죽인 사건이 있었다. 나는 진주를 여행하다가 그곳에서 그 기생을 기리기 위해 지어놓은 사당을 본적이 있다. 조선인들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총칼아래 쓰러져갔다.

한편 중국황제는 히데요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편지속에 나타난 황제의 말투에서 스스로 모멸감을 느낀 히데요시는 평화협정을 파기한다는 전갈을 황제에게 보내고 전쟁을 재개하였다. 이른바 조선에 대한 2차 침공을 단행한 것이다. 중국군은 한반도 남서쪽의 남원시를 향해 진군했다. 일본과의 첫 접전은 남해안에서의 해전이었는데 여기서 조선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가토와 고니시는 이제 그 견고한 성으로 유명한 남원을 향해 돌진해 갔다. 수일 간의 전투가 진행되면서 남원성은 점차 무너져갔다. 일본군은 한쪽으로는 푸른 볏짚단을 쌓아서 성벽을 기어오르고 다른 한쪽으로는 산속의 비밀통로를 통해 남원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수천명의 조선군과 중국군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후에 이들의 코와 귀를 베어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거대한 ‘귀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교토에 가면 기념비와 함께 그 무덤을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한반도 남해안에서는 중국군과 일본군과의 해전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일본군이 전멸당했다. 중국군은 다른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적군의 식량공급선을 차단함으로서 일본군을 무찔렀던 것이다. 한편 일본군은 서울 근교까지 전진해 나갔다. 그러나 중국에서 대규모의 증원부대가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과, 군량미 공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 즉 집과 사원 등을 파괴시켰다. 한때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웅장한 규모의 고도로 유명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이 도시를 불태우고 황폐화시켰던 것이다.

일본군은 마침내 울산의 요새지에 도착하여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일부 군대는 이곳에 남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곧 연합군이 이 요새를 에워싸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는 일본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지만 일본군은 더 이상 적군의 코와 귀를 베어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얼마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때 일본은 히데요시가 죽자 한반도에 있는 모든 일본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그 참담했던 전쟁은 끝이 난 것이다. 그 후에도 약 100년 동안 조선과 일본과의 조공관계는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만주의 거친 유목민 부대가 침임할 때까지 한반도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중국(명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던 조선은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중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619년 드디어 후금이 승리하여 청나라를 세우고 그 왕이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 만주족은 이후에도 계속 중국황실에 도움을 주며 화친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윽고 만주족은 한반도에 관심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조선을 침입하여 서울까지 진격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파괴를 일삼았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두 번 다 한강 이남으로 도망하여 강화도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침입 때 왕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제 조선의 임금은 만주족에게 곡물을 바치고 소규모의 군대를 제공하면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새로 부임한 만주족 황제에게도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예를 들면 그 공물은 100온스의 금과, 일만석의 쌀, 100개의 호랑이 가죽 등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만주족의 침입 이후 최근까지 한번도에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 1653년 네덜란드 선적의 배 한 척이 제주도 근처에서 난파를 당해 그 선원들이 수년 동안 노예로서 조선에 붙잡힌 적이 있었다. 선원 중에 하멜이라는 사람이 조선을 탈출하여 조선에 관한 책을 한권 썼다. 18세기 말에 중국인 신부 1명이, 그리고 1835년 예수회 소속의 프랑스 신부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무릅쓰고 한반도 몰래 숨어들어왔다. 조선에 잠입한 그들은, 이미 중국을 통해 들어온 몇 권의 종교서적을 읽고 기독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몇몇 조선인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벌였던 사역활동과 그들이 당했던 고난은 달레*Charles Dallet)의 <<조선 교회사>>에 잘 언급되어있다.

조선인의 관점에서 볼 때, 서학(기독교)의 혁신적인 성격 -한개종자가 서양군대의 한반도 침입을 종용하는 편지를 썼다가 발각되어 기독교를 정치적 배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사건(황사영 백서사건)과 함께 조선인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관습과 조상숭배의 포기 등을 요구-은 처음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사건을 불러일으켰다. 1839년, 3명의 프랑스 신부가 조선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1866년에는 실권없는 왕(그의 아버지 대원군이 섭정하고 있었음) 아래서 무서운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서양인들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과 중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한다는 풍문이 그 원인이었다. 이 박해사건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 개종자를 포함하여 14명의 주교와 신부들이 처형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은 그 해(1866년)에 일어났다. 프랑스 함대 한 척이 한반도 해안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한강 하구의 강화도를 수비하는 조선군대를 전멸시키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정벌도 계획하지 않았다. 1871년에는 평양 근처에서 좌초된 미국 상선제네럴 셔먼호의 선원들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미 군함 수척이 조선을 침공하였다. 맹렬한 전투가 벌어진 후 모노카시(Monocacy)호와 팔로스(Palos)호의 선원들은 강화도의 4군데 요새지를 점령했다 1876년 실제적인 통치권을 장악한 조선의 임금은 일본과의 통상조약에 조인하고 오랫동안 닫혔던 ‘은자의 나라’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1882년 슈펠트 제독의 주선으로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이 체결되고, 그 후 다른 서양 제국과의 조약이 잇따라 체결되었다. 그 해(1882년)가 저물기 전, 서양을 미워하는 대원군이 주동이 되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 많으 일본인이 죽고 대원군은 중국 군함에 실려 중국 산동반도로 납치되어갔다. 조선이 서양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기 전, 프랑스 신부와 제너럴 셔먼호 선원 살해사건이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을 때, 중국은 조선 정부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매년 공물을 상납받았으며, 미묘한 외교 정책하에 총독을 조선에 주둔시켜 놓고 적어도 서양과 관계된 조선의 모든 외교정책에 관한 한 간섭을 서습치 않았다. 조선에서 수년 동안 외교 고문으로 활동해 온 미국 오레곤 출신의 데니(O. N. Denny) 판사는, 비록 중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의 추천으로 그 직책에 임명되었을지라도, 현재 조선에서의 중국의 위치에 강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보수파의 미움을 받아오던 진보적인 젊은 양반들은 1884년 폭동을 일으켰다. 고위층 관리들이 피살되고 3일 동안 이 진보파 청년들이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나 중국군대가 나타나 보수파의 편에서 반격을 가하고, 일본군은 진보파의 편을 들었다. 양파간의 싸움에서 진보파 청년들은 역부족을 느꼈다. 그들은 일부는 일본에서 또 일부는 미국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한편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자신들의 설자리를 잃고 해안가로 쫓겨나 있었다. 이제 한반도는 중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간단히 언급하겠다. 한반도 남쪽에서 지방관리들의 지나친 폭정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국왕은 중국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중국이 이홍장 휘하에 지원병을 보내자 일본은 분개하면서 이것은 중일조약(천진조약)에 위배된다고 했다. 일본군은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외치며 중국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반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수도 서울을 수호하는 2개의 커다란 요새지를 점령했다. 이 전쟁에서의 주요한 사건은, 영국기를 단 중국 상선 코쉬(Kowshing)호의 침몰, 아산만과 평양에서의 전투, 압록강 입구에서의 해전, 중국의 요새지 여순항과 위해위항의 점령 등이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왕궁으로 몰려들어가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자신들의 개혁에 동조하는 조선인 관리들을 정부요직에 임망했다. 조선에 주재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은 이와 같은 개혁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혁(갑오개혁)은 완벽하고 훌륭했다. 일본군대는 당연한 듯이 친구의 나라 조선 땅으로 행진해 들어와 현 정부를 무너뜨리며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일본이 자기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행정가인 이노우에 백작을 조선공사로 임명한 것을 보면 그들이 조선의 개혁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그후 일본의 이토 내각은 미우라 자작을 이노우에의 후임자로 조선공사에 임명하는 실수를 범하여 일본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쳤다. 즉 1895년 10월 8일 지금까지 조선의 가장 빈틈없는 정치가로 알려진 왕비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비탄에 빠진 왕은 수개월 동안 왕궁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2월이 되었다.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왕과 왕세자는 한 머리좋은 계락가에 의해 궁녀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왕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 씨와 그의 상냥한 부인은 왕과 왕세자를 극진히 대접했다. 얼마 전까지 멕시코에서 일하고 있던 웨베르 씨는 최근에 완성된 조선의 러시아 공관에 공사로 임명되어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알기론 그들 부부는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대 러시아제국이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점 증가해갔다. 1년 동안 러시아 공관에 머물러 있던 조선왕은 외국공관들이 주위에 둘러싸인 새로운 왕궁(덕수궁)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올 가을에 그는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면, 국호도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대한’(大旱)으로 바꿀 것이라고 한다. 대한의 ‘한’은 독자들도 기억하고 있듯이 조선의 초기역사 시대에 한반도를 몇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각각의 지역에 붙였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