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용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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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용기] 초월된 유신론
초월된 유신론 무의미함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가 우리가 '절대적 신앙' 이라 부르던 존재 기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특정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내용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절대적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God above God)' 이다. 절대적 신앙과 그로 인한 결과 - 근본적인 의심과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 - 는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개념을 초월한다. 유신론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화되지 않은 긍정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무슨 뜻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전통적이고 심리학적인 함축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내용이 없는 유신론도 하나님을 인용함으로써 마치 ..
2012.07.22 -
[존재의 용기] 존재를 밝혀 주는 비존재
존재를 밝혀 주는 비존재 모든 형태의 존재의 용기는 그 자체로 계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보여 주고, 존재의 자기 긍정이 부정성을 극복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은유적인 진술 - 자체에 대한 모든 주장은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이다 - 을 사용하면 존재가 비존재를 포함하지만 비존재가 그것을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포함한다'는 말은 존재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과 반대되는 비존재까지 끌어안는다는 의미를 지닌 공간적인 은유이다. 비존재는 존재에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존재에서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중적인 부정 없이 '존재' 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즉, 존재는 존재의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의 힘'이라는 은유로써 존재를 가장 잘 묘..
2012.07.07 -
[존재의 용기] 절대적 신앙과 존재의 용기
절대적 신앙과 존재의 용기 나는 존재 기반과의 신비적인 연합에 바탕을 두는 존재의 용기에 대한 설명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바탕을 두고 있는 존재의 용기에 대한 설명에서 믿음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는 그렇게 하면 믿음의 개념이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뭔가 믿지 못할 것에 대한 믿음' 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아닌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신비적인 연합이나 인격적인 만남이 믿음의 개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한을 넘어 무한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고양 - 영혼을 존재 기반과의 연합으로 이끌어 주는 - 에 믿음이 깃들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믿음의 개념에는 그..
2012.07.05 -
[존재의 용기] 운명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운명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죽음과 악마의 상징적인 모습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이 시대의 불안은 죄의식에 대한 불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죽음과 운명의 불안이기도 하다. 고대 말기 세계 점성술의 사상들이 르네상스에 의해 재생되었고 종교개혁에 참여한 인문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에 표현된 신스토아적 용기에 대해 이미 살펴보았다. 그 그림을 보면 자기 인생이라는 배가 운명의 바람에 밀려가긴 하지만 인간은 그 배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루터는 운명의 불안을 다른 차원에서 직면했다. 그는 죄의식의 불안과 운명의 불안 사이의 관련을 몸소 경험했다. 일상의 삶에서 만들어 내는 무수히 많은 비합리적인 두려움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2012.07.03 -
[존재의 용기] 죄의식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죄의식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개신교적 확신의 용기의 중심에는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가 있다. 루터는 불안의 주요 형태로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경험했다. 이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용기는 우리가 확신의 용기라고 부르던 그 용기이다. 그것은 신의 용서에 대한 개인적이고 전체적이며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이 지닌 모든 형태의 존재의 용기에는 용서함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심지어 신집단주의 내에도 그러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신집단주의에는 진정한 개신교에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인간 실존에 대한 해석이 없다. 또 거기에는 심오하면서도 역설적인 역사 내의 운동도 없다. (신의 용서라는 관점에서) "불의한 자가 의롭게 된다." 는 루터의 공식이나 "용납되지 못할 자가..
2012.07.02 -
[존재의 용기] 신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존재의 용기
신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존재의 용기 개별화의 축은 신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종교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거기에서 유래한 용기는 종교적인 경험 속에서 표명되는 개인적인 현실에서 확신의 용기이다. 신비적인 연합과 구별하여 이 관계를 용기의 원천과의 인격적인 교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두 유형은 대조되긴 하지만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화와 참여의 극적인 상호 의존성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신교 내에서 확신의 용기는 종종 믿음의 용기와 동일시 된다. 그러나 확신은 믿음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 믿음은 신비적인 참여와 개인적인 확신을 모두 포용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의 표현으로써 종교적인 만남을 묘사한다. 성서주의..
2012.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