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용기] 죄의식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2012. 7. 2. 00:52로뎀나무/세번째

죄의식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개신교적 확신의 용기의 중심에는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가 있다. 루터는 불안의 주요 형태로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경험했다. 이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용기는 우리가 확신의 용기라고 부르던 그 용기이다. 그것은 신의 용서에 대한 개인적이고 전체적이며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이 지닌 모든 형태의 존재의 용기에는 용서함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심지어 신집단주의 내에도 그러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신집단주의에는 진정한 개신교에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인간 실존에 대한 해석이 없다. 또 거기에는 심오하면서도 역설적인 역사 내의 운동도 없다. (신의 용서라는 관점에서) "불의한 자가 의롭게 된다." 는 루터의 공식이나 "용납되지 못할 자가 용납되었다." 는 현대적인 표현 속에는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이긴 승리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존재의 용기는 용납될 술 없는데도 용납된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용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울과 루터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of faith)' 교리의 진정한 의미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신학자들에게 일깨워 줄 필요는 없다. (성경 원문 속의 그 교리는 신학을 연구한 사람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심리요법으로 죄의식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에서 용납이라는 사상이 주목받고 있고, 이것은 또 종교개혁 시대의 '죄 용서' 나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됨' 과 같은 구절과 똑같은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용납될 수 없는 존재지만 용납됨을 용납하는 것은 확신의 용기를 위한 기초이다.

이러한 자기 긍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떠한 도덕적, 지적, 혹은 종교적 전제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를 지녔다고 칭함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은 선하거나 지혜롭거나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특성들은 없지만 자신이 용납될 수 없음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우발적인 개인성에 대한 칭의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무한히 초월하는 그 무엇에 의해 용납된다고 하는 역설적인 행위를 일컫는다. 종교개혁자들의 경험에서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용납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존재의 용기는 죄의 용서를 인정하는 용기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얻는 근본적인 경험으로서의 용기이다. 죄의식과 정죄의 위협에도 이루어지는 자기 긍정은 자아를 초월하는 그 무엇에 대한 참여를 전제로 한다. 예를 들면, 심리요법이라는 상황의 치료 과정에서 환자는 비록 자기 스스로 용납될 수 없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도와주는 조력자의 치료의 힘속에 참여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치료자는 한 개인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납과 자기 긍정의 객관적인 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힘은 치료자를 통해 환자 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물론 그것은 죄의식을 깨달을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런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납할 수 있는 한 개인 속에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인격적이지  못한 뭔가에 의한 용납은 결코 인격적인 자기 부정을 극복하지 못한다. 벽에 내 죄를 고백한다고 해도 그 벽이 나를 용서해 줄 수 없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통하여 용납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자아 용납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 인격적으로 용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용납에 응하는 초월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즉, 확신의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용납되었다고 해서 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환자에게 그가 정말로 죄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노력하며 치료를 돕는 조력자는 그에게 상당히 모질게 굴지도 모른다. 그는 환자가 자기 죄를 자신의 자아 긍정속으로 가져오지 못하게 차단한다. 그는 그릇되고 신경과민적인 죄의 느낌을 올바른 자리에 놓인 온전한 죄의식으로 변하게 하기 위해 도와 주겠지만, 환자에게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환자를 정죄하지 않고 동시에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으면서 자신과의 교제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용납'은 의학적인 치료의 수준을 초월한다. 종교는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함으로써 치유하는 힘의 궁극적인 원천, 즉 바로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용납, 하나님의 용서 혹은 의롭게 하심은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자신 속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존재의 용기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원천이다. 왜냐하면 자기 긍정의 궁극적인 힘만이 존재 자체의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못한 모든 것,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유한한 존재의 힘은 자기 정죄의 절망에서 경험되는 비존재의 근본적이고 무한한 위협을 극복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루터와 같은 인물 속에서 표현되는 확신의 용기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자신의 존재의 용기를 위한 다른 근거들이 불충분할 뿐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은 죄의식과 깊은 불안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는 이유이다. 16세기의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용납됨을 용납할 수 있는 불굴의 용기 창조로 인해 거대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라는 교리 때문이었다. 즉, 확신의 용기는 유한한 것의 제약을 받지 않고, 다만 그 자체가 무조건적이며 우리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무조건적이라고 경험한 것의 제약을 받는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존재의 용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