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용기] 용기를 상실한 이 시대를 통찰한다.
2012. 6. 27. 19:25ㆍ로뎀나무/세번째
아래 책 내용에서 한마디로 느낀 소감.
용기를 상실한 이 시대를 통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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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창조적 실존주의 태도 속의 절망의 용기
나는 앞부분에서 실존적 절망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창조적인 용기를 지닌 인물들을 다루었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냉소주의라 부르는 비창조적 실존주의 태도가 있다. 오늘날의 냉소가들(cynics)은 그리스 사람들이 냉소가라 부르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리스인들에게 냉소가는 이성과 자연의 법칙에 근거하여 당대의 문화를 비평하던 사람이었다. 냉소가는 혁명적인 합리주의자였고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였다. 현대의 냉소적인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성에 대한 믿음이 없고, 진리의 기준도 없으며, 가치의 체계도 없고, 의미에 관한 질문의 답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규범들을 훼손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들의 용기는 창조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의 형태 속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거부하고 싶은 모든 것을 거부할 자유를 자신들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모든 해결책을 용감하게 거절한다. 냉소주의자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표시하기 위해 친구가 필요하면서도 여전히 외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잠정적인 의미나 궁극적인 의미를 모두 결여하고 있으므로 쉽게 신경과민적인 불안의 희생물이 된다. 지나치게 강제적인 자기 긍정과 지나치게 광신적인 자기 포기는 모두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비창조적 표현인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의 한계
이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가, 창조적인 형태는 물론이고 비창조적인 형태 속에서 지니는 한계에 대한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용기는 '~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자기 긍정이며,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자아가 자기 자신으로서 행하는 자기 긍정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이 자아는 무엇인가? 급진적인 실존주의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을 만드는 것이 곧 자아이다. 실존주의는 언제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과 다른 대답은 자아의 절대적 자유를 제한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세계속으로의 참여에서 배제된 자아는 빈 껍질일 뿐이고 단순한 가능성에 불과하다. 자아는 살아 가기 때문에 반드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자아는 모든 행동을 다시 되풀이해야 한다. 그 이유는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하고 있는 자아를 자기의 행동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행동을 하면 자연히 내용이 생기기 때문에 행동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자유를 제한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고전적인 신학에서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a se) 이며 절대적 자유이다. 어떤 것도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실존주의는 "신은 죽었다."는 메시지에 근거하여 인간에게 신적 '자존성(a-se-ity)'을 부여해 주었다. 인간에게는 인간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적이고, 지금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받았고 그와 더불어 존재의 구조도 부여 받았다. 여기에는 유한한 자유의 구조도 포함된다. 유한한 자유는 자존성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빈 껍질이나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 그 속에서 인간은 행동이나 비행동 이전에 자신을 발견한다 - 라는 것을 긍정해야만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유한한 자유는 한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만일 자아가 이 구조를 침범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르트르가 지은 "이성의 시대"의 주인공-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으려는 - 은 우연성의 그물에 사로잡힌다. 그 우연성의 일부는 주인공 자신의 잠재의식 단계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그가 벗어나지 못하는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완전히 비어 있는 자아는 여러 가지 내용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을 내용으로 의식하거나 그것들을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앞에서 말한 냉소주의자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자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자아는 그가 보존하기 원하는 자유의 완전한 상실로 그를 몰아간다.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극단적인 형태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인 자기 파괴는 19세기의 혁명적인 실존주의에 대한 20세기의 전체주의적 반응 안에서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생했다. 비인간화와 객관화에 대한 실존주의의 저항과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억압적인 집단주의 형태로 변해 버렸다.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한 운동으로 고안된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사람 - 심지어 다른 이들을 노예화하는 사람들마저 -을 노예화하는 체제로 변질된 것은 우리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지식인 계급이 심리학적인 파괴라는 관점으로 이러한 비극을 막대함을 상상하기란 그야말로 힘든 일이었다. 존재의 용기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손상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19세기의 혁명적인 운동의 의미에서 보는 존재의 용기였기 때문이다. 그 용기가 무너져 내리자 사람들은 비극적인 실망을 가져다 준 원인에 대한 광신적, 신경과민적 반작용에 휩싸여 신집단주의 체제로 돌아서거나, 혹은 모든 체제와 모든 내용들에 대한 냉소적, 신경과민적 무관심으로 돌아섰다.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니체적인 유형에서 신집단주의의 파시스트 나치 유형으로 변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유사한 현상들이 명백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운동들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적 집단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인든지 다 구현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용기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공산주의와는 달리 이러한 체제가 무너지긴 했지만, 그로 인해 혼란, 무관심, 냉소주의라는 여파가 밀려왔다. 또 그러한 요소들은 권위와 새로운 집단주의에 대한 열망이 자라는 토양이 되었다.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에 대한 내용을 다룬 앞의 두 장에서 보았듯이,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 만일 그것이 급진적으로 발휘되면 - 는 집단주의 내에서 자아의 상실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실존주의 내에서 세계의 상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를 마지막 장에서 제기하는 질문으로 이끌어 준다. 두 가지 유형의 용기를 모두 초월함으로써 두 용기를 통합하는 존재의 용기가 있는가?
존재의 용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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