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라는 확신의 용기, 믿음 - 이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다.
아래의 짧은 구절에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라는 확신의 용기, 믿음에 대한 혜안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아래의 이성적인 이해와 사고를 넘는
강력한 믿음 가지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데로 주님이 믿음 주시는 것 보다는 못하는 것 같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장 17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빌립보서 3장 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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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용납'은 의학적인 치료의 수준을 초월한다. 종교는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함으로써 치유하는 힘의 궁극적인 원천, 즉 바로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용납, 하나님의 용서 혹은 의롭게 하심은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자신 속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존재의 용기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원천이다. 왜냐하면 자기 긍정의 궁극적인 힘만이 존재 자체의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못한 모든 것,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유한한 존재의 힘은 자기 정죄의 절망에서 경험되는 비존재의 근본적이고 무한한 위협을 극복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루터와 같은 인물 속에서 표현되는 확신의 용기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자신의 존재의 용기를 위한 다른 근거들이 불충분할 뿐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은 죄의식과 깊은 불안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는 이유이다. 16세기의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용납됨을 용납할 수 있는 불굴의 용기 창조로 인해 거대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라는 교리 때문이었다. 즉, 확신의 용기는 유한한 것의 제약을 받지 않고, 다만 그 자체가 무조건적이며 우리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무조건적이라고 경험한 것의 제약을 받는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존재의 용기 중에서... <죄의식 그리고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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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됨 - 우리 죄가 대신 죄값이 갚아진 (대속죄) 은혜를 여러가지로 이해하는데...
성경 말씀은 너무 명확하고 단조롭게 생각할라치면,
철학과 사상적인 논리로 따라가자면 저렇게
복잡한 작용들이 우리 내적으로 이루어 진다니..
놀랍니다.
그러나 한가지 감사하다.
우리 주님은 저런 복잡한 것을
한번에 끝내 주셨고,
간단히 주님께로 오라 하신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들은 자꾸 그 발걸음이 머뭇거려 진다.
... ...
바로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무조건적이라고 경험한 것의 제약"이
바로 우리의 머뭇거림에서 발생되는 제약이 있다면 제약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