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용기] 절대적 신앙과 존재의 용기

2012. 7. 5. 01:23로뎀나무/세번째

절대적 신앙과 존재의 용기



나는 존재 기반과의 신비적인 연합에 바탕을 두는 존재의 용기에 대한 설명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바탕을 두고 있는 존재의 용기에 대한 설명에서 믿음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는 그렇게 하면 믿음의 개념이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뭔가 믿지 못할 것에 대한 믿음' 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아닌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신비적인 연합이나 인격적인 만남이 믿음의 개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한을 넘어 무한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고양 - 영혼을 존재 기반과의 연합으로 이끌어 주는 - 에 믿음이 깃들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믿음의 개념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도 믿음이 들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의 개념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믿음은 존재 자체의 힘에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이다. 존재의 용기는 믿음의 표현이며 믿음이 의미하는 바는 반드시 존재의 용기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용기를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존재의 자기 긍정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자기 긍정의 힘은 용기의 모든 행동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존재의 힘이다. 믿음은 이러한 힘의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용납됨을 용납한다는 역설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 존재 자체는 모든 유한한 존재를 무한히 초월한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만남에서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초월한다. 믿음은 그러한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힘이 항상 있고, 분리되었던 사람이 용납됨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무한한 간격을 메워 준다.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믿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용기가 생겨난다. 믿음은 불활실한 뭔가에 대한 이론적인 긍정이 아니라, 평범한 경험을 초월하는 뭔가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어떠한 상태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그 속에 모든 것이 참여하는 존재의 힘에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이다. 이러한 힘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 자체의 힘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비적인 경험과 인격적인 만남은 동일하다. 그러한 두 가지 모습 속에서 믿음은 존재의 용기의 바탕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처럼 의심과 무의미함의 불안이 지배적인 시대에는 더욱 확연해진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은 지금 시대에 만연해 있다. 운명의 불안은 우리 세대의 정신 분열증 증세가 이전 세대의 안전감의 마지막 잔재를 제거해 버릴 만큼 증가하였다.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역시 팽배해졌다. 막대한 죄의식의 불안이 정신 분석학과 개인 상담에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몇 세기 동안 생명력의 투쟁을 억압해 온 청교도와 부르주아 세력은 중세 시대의 지옥과 연옥에 관한 설교만큼이나 많은 죄의식을 양산해 냈다.

이러한 제한저인 고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시대를 결정하는 불안이 의심과 무의미함의 불안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과 앞으로 상실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 오늘날의 실존주의이다.

어떤 용기가 의심과 무의미함의 형태를 띠고 있는 비존재를 스스로 떠맡을 수 있는가? 이것은 존재의 용기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무의미함의 불안은 운명과 죽음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속에서도 흔들이지 않던 토대를 침식하기 때문이다.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속에서 의심은 궁극적인 책임에 관한 확실성을 동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위협을 받긴 하지만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과 무의미함이 만연되면, 우리는 생의 의미와 궁극적인 책임의 진리가 사라지는 심연을 경험하게 된다. 운명의 불안을 소크라테스적인 지혜의 용기로 정복한 스토아주의나, 용서함을 받아들이는 개신교적 용기로 죄의식의 불안을 극복한 크리스천은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절망과 자기 정죄의 절망 속에서도 의미는 긍정되고 확실성은 보존된다. 그러나 의심과 무의미함의 절망 속에서는 비존재가 두 가지를 모두 삼킨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제기 된다. 무의미함과 의심의 불안을 정복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용납됨을 용납하는 믿음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비존재의 힘을 물리칠 수 있는가? 믿음은 무의미함을 격퇴할 수 있는가? 의심과 무의미함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이번 강의에서 논의되었고 지금 시대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의 마지막 국면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존재의 용기를 만들어 내는 모든 방법들에 담긴 궁극적인 부적절함을 사람들이 경험함으로써 그 방법들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된다면, 어떻게 존재의 용기가 가능하겠는가? 만일 생이 죽음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면, 죄의식이 완전함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된다면, 존재가 비존재처럼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존재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가?

어떤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의심에서 교리적인 확실성으로 도약함으로써, 또 무의미함으로부터 특별한 교회나 정치적인 집단의 의미를 구현하는 상징 체계로 도약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러한 도약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안전함을 향한 열망의 표현일 수 있다. 그것은 실존주의적 원리에 따라 모든 결정을 임의로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실존주의적 원리에 따라 모든 결정을 임의로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인간 실존에 대한 분석으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느낌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이론적인 상황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진정한 회심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이론적인 상황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진정한 회심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근본적인 의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용기를 가져다주지만, 그러한 용기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질문에는 답변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무의미함의 상태를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그 해답이 그러한 상태의 제거까지 요구한다면 이 또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의심과 무의미함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을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그는 절망스러운 상태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해답을 구한다. 그는 우리가 '절망의 용기'라 부른 것의 궁극적인 기초를 요구한다. 단 하나의 가능한 해답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질문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절망을 받아들이는 행동은 본질적으로 믿음이며 존재의 용기 경계선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의 의미는 생의 의미에 대한 절망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이 생의 활동인 이상 그것은 자신의 부저성 안에서 긍정적이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생에 대해 냉소적인 것이 오히려 생에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용납됨을 받는다는 의미에 대하여 절망적임에도 불구하고 용납됨을 받은 존재로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과격한 부정성은, 그것이 능동적인 부정성인 이상 자신을 부정할 수 있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긍정해야만 한다는 역설을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암시적인 긍정 없이는 어떤 부정성도 실제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절망이 만든 감추어진 즐거움은 자기 부정의 역설적인 특성을 그대로 입증한다. 부정성은 그것이 부정하는 긍정에서 생명을 얻는다.

절망의 용기를 가능케 하는 믿음은 존재의 힘 - 심지어 비존재의 통제 아래 있을지라도 - 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절망 속에서도 존재는 우리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의미있는 행위이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는 운명과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그런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는 것을 이미 보아 왔다. 그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에게 위협당하고 공격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참여하는 존재 자체의 힘 - 그에게 운명과 죄의식의 불안을 떠맡을 용기를 주는 - 으로 그런 것들을 용납하는 것을 인정한다. 의심과 무의미함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그런 요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용기를 만들어 주는 믿음에는 특정한 내용이 없다. 그것은 어떤 지시도 받지 않은 절대적인 순수한 믿음일 뿐이다. 그것은 정의를 내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정의하는 모든 것을 의심과 무의미함이 해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절대적 신앙은 주관적인 감정의 분출이 아니며 객관적인 바탕을 결여한 일시적인 기분도 아니다.

절대적 신앙의 본질을 분석하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드러난다. 첫째 요소는 비존재의 가장 급진적인 표명에 직면한 상태에서도 나타나는 존재의 힘에 대한 경험이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경험 속에서 생명력이 절망을 물리친다고 말한다면, 그는 인간 내부에 있는 생명력이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y)에 비례한다는 사실도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이다. 무의미함의 심연을 견딜 수 있는 생명력은 의미의 파괴 속에 숨겨진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절대적 신앙 속에 있는 둘째 요소는 비존재의 경험은 존재의 경험에 의존하며, 무의함의 경험은 의미의 경험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절망의 상태에서도 인간은 절망을 가능케 하기에 충분한 존재를 지니고 있다. 절대적 신앙에 담긴 셋째 요소는 용납됨을 용납하는 것이다. 물론 절망의 상태 속에서  아무도 어느 무엇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용납하는 힘 자체만은 거기에서 경험된다. 무의미함을 경험하는 한, 거기에는 '용납하는 힘' 에 대한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용납하는 힘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적 신앙에 대한 종교적인 해답이다. 그 믿음은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의심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존재의 용기의 가장 역설적인 표명의 믿음이며 원천이다.

이러한 믿음은 신비적인 경험과 신과 인간의 만남을 모두 초월한다. 신비적인 경험은 절대적 신앙에 더 가까운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절대적 신앙은 신비적인 경험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회의론의 요소를 포함한다. 분명히 신비주의도 모든 구체적인 내용들을 초월하지만, 그것은 그러한 요소들을 의심하거나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요소들을 준비 단계로 간주한다는 의미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디딤돌처럼 여겨, 그것들이 사용한 후에는 밟아 버린다. 그러나 무의미함의 경험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부정해 버린다. 무의미함의 경험은 신비주의보다 휠씬 급진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비주의적 경험을 초월한다.

절대적 신앙은 또한 신과 인간과의 만남을 초월한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는 주체-객체의 구조가 효력을 발휘한다. 일정한 주체(인간)가 일정한 객체(신)를 만난다. 이러한 진술을 뒤집어서 일정한 주체(신)가 일정한 객체(인간)를 만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에 의심의 공격은 주체-객체 구조를 약화시킨다. 신과 인간의 만남에 대하여 그렇게도 강력하고 또 자신 있게 말하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만남이 급진적인 의심의 방해를 받고 오로지 절대적인 신앙만 남게 되는 상황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을 종교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하게 되면, 일반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비평과 변형에 반드시 종속되어야 한다는 결과를 가져온다. 과격한 형태를 띤 존재의 용기는 신비주의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모두 초월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깨닫는 열쇠이다.


<존재의 용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