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용기] 초월된 유신론

2012. 7. 22. 22:31로뎀나무/세번째

초월된 유신론



무의미함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가 우리가 '절대적 신앙' 이라 부르던 존재 기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특정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내용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절대적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God above God)' 이다. 절대적 신앙과  그로 인한 결과 - 근본적인 의심과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 - 는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개념을 초월한다.

유신론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화되지 않은 긍정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무슨 뜻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전통적이고 심리학적인 함축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내용이 없는 유신론도 하나님을 인용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치가, 독재자, 그리고 청중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수사학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좋아한다. 그 단어는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지하고 도덕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러한 일은 특히 그들이 자기의 적을 무신론자로 낙인찍을 수 있다면 더욱 크게 성공한다. 높은 계급에 있으면서 명확한 종교적 헌신을 결여한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유신론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 이 하나님이 무엇이든 간에 - 없이 세계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함축성이 필요하고,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최고위 계급에서 이러한 종류의 유신론을 지닌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심오한 감정적 상태나 가장 고상한 윤리적 사상을 표현하는 시적인 혹은 실제적인 상징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두 번째 유형의 유신론과 우리가 '초월된 유신론' 이라 부르는 것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유신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불명확하여 이러한 경계선을 넘어가지 못한다. 이와 같은 모든 유형의 유신론에 대한 무신론적 부정은 유신론 자체만큼이나 모호하다. 그것은 불경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유신론적 주장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분노에 찬 반응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심지어 이러한 무신론적 부정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수사적, 정치적 남용에 대항하는 정당한 것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기가 부정하는 유신론과 별 다름 없이 적절치 못하다. 무신론이 절망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유신론이 믿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신론은 첫번째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신과 인간의 만남도 유신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 경우에 유신론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강조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유신론은 성경과 개신교 신조들 속에 있는 인격주의적 경향을 띤 구절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주의적 이미지 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창조와 계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특징, 인간의 믿음과 신적인 용서의 인격적인 본질, 우주에 대한 역사적 시각, 신적인 목적의 개념,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의 무한한 간격,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절대적인 분리,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의 갈등, 기도와 실천적인 헌신의 인격 대 인격적인 특성 등도 강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신론은 성경적인 종교와 역사적 기독교의 비신비적인 면이다. 이와 같은 유신론의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은 신과 인간의 만남을 벗어나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그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닌 실존적인 문제이다.

유신론은 상당히 신학적인 차원에 속하는 세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학적 유신론은 모든 신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개념화하는 종교적인 실체에 의존한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을 긍정해야할 필요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이상, 첫번째 의미의 유신론에 종속된다. 세 번째 의미의 유신론은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 에 대한 논증을 전개한다. 그러나 세 번째 유신론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 대 인격적인 만남의 교리를, 서로 만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두 인격, 서로 독립된 실재성을 지닌 두 인격에 관한 교리로 바꿔 놓은 신론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이상, 두 번째 의미의 유신론에 좀 더 의존하기 마련이다.

이제 첫번째 의미의 유신론은 적절치 못하기 때문에 초월해야 하고, 두 번째 의미의 유신론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의미의 유신론은 옳지 못하기 때문에 초월해야 한다. 그것은 옳지 못한 신학이다. 이런 사실은 좀 더 예리한 분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마치 전체 실체의 일부인 것처럼 다른 것들과 나란히 있는 존재이다. 이 하나님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지만, 여전히 일부이기 때문에 전체 구조에 종속되는 존재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실체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요소와 범주들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모든 진술들은 하나님을 그러한 요소와 범주들에 종속시킨다. 하나님을 나름의 세계를 지닌 자아(a self)로,  너(thou)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an ego)로, 결과와 분리되어 있는 원인으로, 그리고 한정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본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being-itself)가 아닌 하나의 존재(a being)이다.  하나님이 실체의 주체-객체 구조에 속해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주체로서의 우리를 위한 객체이다. 동시에 우리는 주체인 하나님에게 객체들이다. 이것은 신학적 유신론을 초월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왜냐하면 주체로서의 하나님은 나를 객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객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능하고 전지하기 때문에 내게서 주체성을 박탈한다. 나는 반란을 일으켜 하나님을 하나의 객체로 만들려고  애쓰지만, 그 반란은 실패하고 나는 절망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은 무적의 전제 군주처럼 보이고, 자유와 주체성을 상실한 다른 모든 존재들과 현격하게 다른 존재(the being) 같은 모습을 지닌다. 하나님은 공포로써 위협하며 모든 사람을 단순한 객체로, 많은 사물 가운데 하나로, 자신들이 통제하는 기계의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로 바꾸려 애쓰는 독재자들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하나님은 실존주의가 불쾌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니체는 하나님이 반드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신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어느 누구도 절대 지식과 절대 통제의 단순한 대상이 되는 객체로서 남아 있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무신론이 지닌 가장 깊은 뿌리이다. 바로 이것이 신학적 유신론과 거기에서 비롯한 혼란스러운 암시들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정당화되는 무신론이다. 이것은 또한 실존주의적 절망과 우리 시대에 널리 퍼진 무의미함의 불안이 지닌 가장 깊은 뿌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절대적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의 경험은 모든 형태의 유신론을 초월한다. 이것은 용납하는 누구 또는 무엇이라고 하는 용납의 주체가 없는 용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용납하고 존재의 용기를 주는 것은 존재 자체의 힘이다. 이것은 우리의 분석이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유신론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그런 방법으로는 도무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신비적인 용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모두 초월한 것처럼 신비주의와 인격적인 만남을 모두 초월한다.


<존재의 용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