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용기] 존재를 밝혀 주는 비존재
2012. 7. 7. 00:53ㆍ로뎀나무/세번째
존재를 밝혀 주는 비존재
모든 형태의 존재의 용기는 그 자체로 계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보여 주고, 존재의 자기 긍정이 부정성을 극복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은유적인 진술 - 자체에 대한 모든 주장은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이다 - 을 사용하면 존재가 비존재를 포함하지만 비존재가 그것을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포함한다'는 말은 존재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과 반대되는 비존재까지 끌어안는다는 의미를 지닌 공간적인 은유이다. 비존재는 존재에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존재에서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중적인 부정 없이 '존재' 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즉, 존재는 존재의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의 힘'이라는 은유로써 존재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힘은 존재가 다른 존재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이다. 만일 우리가 존재 자체의 힘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 말 속에는 존재가 비존재에 대항하여 자신을 긍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용기와 생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생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언급했다. 그러한 이해는 비존재가 존재에 속하고, 존재는 비존재 없이 생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관점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비존재 없는 존재의 자기 긍정은 자기 긍정이 아니라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기 동일성일 따름이다.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고,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존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존재를 몰아내며, 존재가 자신을 역동적으로 긍정하도록 강요한다. 철학은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논할 때마다 존재 자체의 역동적인 자기 긍정을 다루었다. 특별히 신플라톤주의, 헤겔, 그리고 생 철학자들과 과정 철학자들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신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다룰 때마다 그와 동일한 일들을 수행했다. 특히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의 삼위일체적 상징화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났다.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한 자신의 정적(靜的)인 정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 - 유한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지식을 통하여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 에 대해 말하면서 철학적인 경향과 신비적인 경향들을 결합했다. 비존재 - 하나님 안에서 그의 자기 긍정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 는 신적인 자기 격리 상태를 열어젖히고 그를 힘과 사랑으로 드러냈다. 비존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신이 자기 자신 안에서와 창조물들 속에서 극복해야 할 부정(No)이 없으면, 그 자신에 대한 신적인 '긍정(Yes)'은 생기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존재의 기반이 드러나는 계시도 없을 것이며, 생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존재가 있는 곳에는 유한성과 불안이 있다. 비존재가 존재 자체에 속한다는 말은, 유한성과 불안이 존재 자체에 속한다는 말과 같다.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신적인 행복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그들은 암시적으로(어떤 때에는 노골적으로) 신적 무한성의 행복 속으로 영원히 이끌려 들어온 유한성의 불안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은 자신과 유한을 포함하고, '긍정(Yes)'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속으로 이끌어 온 '부정(No)'을 포함하며, 행복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정복한 불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은 존재가 비존재를 포함하고 비존재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특징이 거기에 담긴 진리를 감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런 말들은 그러한 진리를 위한 조건이다. 존재 자체에 대하여 비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신적인 자기 긍정은 유한한 존재의 자기 긍정과 존재의 용기를 가능케 만들어 주는 힘이다. 존재 자체가 비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긍정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용기가 있을 수 있다. 용기는 존재 자체의 자기 긍정에 참여하고, 비존재를 압도하는 존재의 힘에 참여한다. 신비적이거나 개인적인 혹은 절대적 신앙의 행위 속에서 이러한 힘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이 지닌 존재의 용기의 원천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러한 원천을 반드시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냉소주의와 무관심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그 원천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불안을 떠맡는 용기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러한 원천은 그의 내부에서 작용한다. 존재의 힘은 존재의 용기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우리 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용기의 모든 행위 - 그 행위의 내용이 의심스럽다 하여도 - 는 존재의 기반이 드러나는 표현이다. 그 내용은 진정한 존재를 드러낸다. 존재 자체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존재의 용기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존재 자체의 자기 긍정 속에 참여한다. 거기에는 신의 '실존' 을 위한 타당한 논증은 없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르고 있든 간에) 존재의 힘을 긍정하는 용기의 행위들은 반드시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용납됨을 의식적으로 인정한다. 만일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참여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존재의 힘은 자신의 모습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용기는 감춘 것을 드러내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존재의 용기는 존재 자체로 통하는 관문이다.
<존재의 용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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