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삼창(三唱)?
2017. 3. 31. 18:58ㆍ선교 교회이야기
주여 삼창(三唱)?
말씀을 바르게 알고 , 바르게 믿고 , 바르게 행하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때론 알지 못하여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삼창(三唱?)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없다'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주여!“ 삼창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고 간절
히 기도한다면 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래의
글을 올려봅니다..
주여 삼창의 배경은
성경 다니엘서 9장 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
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
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라는 말씀에서
1. 주여 들으소서
2. 주여 용서하소서
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기도한다는
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 위마다 지
칭하여 부른다’는 설과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
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援用) 하여 "주
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
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
다.
다음은 우주현 목사의 한국인의 기도!(KOREAN
PRAYER!)에 대한 글인데 많은 공감이 되어 올려봅니
다.
KOREAN PRAYER!
-우주현 목사-
제발! 주여~주여~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
오. 이는 무당들이 귀신 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
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
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 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
오.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
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
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
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
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
신학’ 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교수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시의 교회성장의 한 모델
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
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
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 와그너 교수
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 라는 이름으
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
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 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
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
말 그대로 ‘주여!’ 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
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 가 아니라 한국말
로 ’주여를 세 번 큰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
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
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
상품으로 ‘KOREAN PRAYER’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
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의 눈
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
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
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 이라고 생각되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
터 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 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
다. ‘KOREAN PRAYER’ 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
고 판단한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
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
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
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 보
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때 - 유독 큰 소리로 기도
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
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
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
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
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라 말씀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습니
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전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I will
answer...',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
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부르짖다’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
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
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
리에게 다시 보여 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
를, 그의 인격을 부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
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
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
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
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
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
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
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
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
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
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
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
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
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
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
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핀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
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
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
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
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
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
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
다. 오리혀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
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
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
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
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
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
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
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
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
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
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
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
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
서 문가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
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
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
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
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
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
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
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
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
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
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
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
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
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
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
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
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
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
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
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
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
레스를 푸는- 기도일 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
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
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
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
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묵
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
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
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
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
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
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
말씀을 바르게 알고 , 바르게 믿고 , 바르게 행하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때론 알지 못하여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삼창(三唱?)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없다'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주여!“ 삼창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고 간절
히 기도한다면 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래의
글을 올려봅니다..
주여 삼창의 배경은
성경 다니엘서 9장 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
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
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라는 말씀에서
1. 주여 들으소서
2. 주여 용서하소서
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기도한다는
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 위마다 지
칭하여 부른다’는 설과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
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援用) 하여 "주
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
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
다.
다음은 우주현 목사의 한국인의 기도!(KOREAN
PRAYER!)에 대한 글인데 많은 공감이 되어 올려봅니
다.
KOREAN PRAYER!
-우주현 목사-
제발! 주여~주여~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
오. 이는 무당들이 귀신 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
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
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 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
오.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
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
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
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
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
신학’ 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교수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시의 교회성장의 한 모델
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
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
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 와그너 교수
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 라는 이름으
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
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 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
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
말 그대로 ‘주여!’ 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
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 가 아니라 한국말
로 ’주여를 세 번 큰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
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
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
상품으로 ‘KOREAN PRAYER’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
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의 눈
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
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
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 이라고 생각되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
터 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 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
다. ‘KOREAN PRAYER’ 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
고 판단한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
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
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
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 보
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때 - 유독 큰 소리로 기도
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
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
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
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
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라 말씀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습니
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전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I will
answer...',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
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부르짖다’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
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
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
리에게 다시 보여 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
를, 그의 인격을 부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
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
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
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
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
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
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
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
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
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
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
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
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
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
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
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핀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
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
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
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
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
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
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
다. 오리혀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
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
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
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
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
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
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
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
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
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
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
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
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
서 문가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
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
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
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
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
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
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
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
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
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
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
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
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
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
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
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
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
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
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
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
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
레스를 푸는- 기도일 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
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
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
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
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묵
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
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
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
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
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
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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