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4. 00:56ㆍ교육
(1부) 성경이란 무엇인가요?
https://youtu.be/1hz0qxehnzA
성경이란 무엇인가요?
(핵심 요약)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되어있는데
그 66권 전체가 어떤 얘기냐면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경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내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에요.
그것을 언어로 외면화해 놓은 게
성경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전체)
- 성경이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긴 어렵고
성경이라고 하는게 책이죠.
사실은 성경을 뜻하는 단어는 책이라는 뜻이고
'그 책' 인데요.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부르짖음과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애태우심이 만난 현장.
혹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찾는 인간이
함께 교직한 Tapestry(여러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그 속에
참된 사람의 길을 보여주는
온갖 경험들이 담겨있고요.
이게 세속적으로 성경을 얘기하는 하나의 방식일 겁니다.
-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야기가 이렇게 접근이 돼야 할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문제 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식이라고 하는게 있죠.
다른 동물들에게 자기의식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달리 얘기하면,
타자라고 하는 거울 앞에 선, 나의 모습을 의식하느냐? 그런 이야기 입니다.
인간은 타자를 거울 삼아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존재인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자기반성 혹은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왜?" 라는 질문을 품고 삽니다.
"왜?" 라고 하는 질문을
동물들은 아마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동물학자가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왜?"라고 하는 질문은 오로지
인간만이 하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달리 얘기하면, 인간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그 질문에는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내놓기가 어렵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인간은 털 없는 두 발 달린 짐승이야" 이렇게 얘기하면
그게 인간에 대한 규정으로
우리 마음에 흔쾌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잖아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예요.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이런 질문입니다. 파스칼의 질문이라고 하지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근데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어요.
"왜 존재하는 걸까?"
"왜?" 라고 하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게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이라고 하는 게
불확실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게
정해진 프로그램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자기의 삶을 끝없이 선택해야 하고
선택한 삶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불확실하고 모호한 삶 가운데서
인간이 느끼는 기본적인 정서가 있다고 한다면
불안함 일 겁니다.
늘 불안해요.
이게 흥미로운게
에덴동산 이후에 첫번째 태어난 사람이 가인인데
그 가인이 나중에 형제 살해자가 되는 이야기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재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재물은 받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시기하고 분노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창세기 4장 4-8절
형제를 죽인 자로서의 자책감이 있죠.
그래서 그는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가서 살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에덴의 동쪽의 이름을
성경은 놋 땅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놋이라고 하는 그 뜻은
'유리하다. 방황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재미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어떤 대상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경쟁하고 극복하고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 가인의 경험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를 사로잡은 정서는 불안이고
방황하는 삶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방황하고 불안한 그 마음은
언제나 뭔가 확실한 것을 갈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가 내 불안한 마음을 붙들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을 달래줄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게 되죠.
"불안의 대용물을 구한다"고 얘기하는데...
내가 가진 현금 자산 같은 것들이
내 불안한 삶을 붇들어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맺는 다양한 관계
또 나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사람들이
내 불안한 삶을 붙들어줄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넉넉하다고 해도
또 굉장히 다양한 만남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 불안감 같은 것들은
해소 되는 법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내 속에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경험하게 되는 거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그 빈구석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이게 신앙적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불안 속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 확실한 것에 의해 내가 보호받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고요.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절대적 대상들을 구할 수밖에 없는게
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삶을 통제하는
더 큰 힘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어느 문화권이든지 그런 존재를 상정했던 거죠.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상정한 신에게 가는 게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출애굽기는 바로 그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죠.
불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들어냈던 건 뭐예요?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불안을 이겨보자'
생각하는 거죠.
그게 바벨탑 같은 것들입니다.
하늘에 닿는 대를 쌓아보자. 그래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그러니까 불안한 마음들이 서로를 똘똘 뭉치게 만드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사람들의 모듬살이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데...
낯선 타자와 공존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다르고 바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망의 갈등이 생겨나요.
내가 바라는 바와
또 내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점점 불화하기 시작해요.
자기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속에서 인간이
자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힘을 갖기를 원하는 거죠.
다른 사람의 삶을 통제함으로
내가 능력 있는 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고요.
바로 이런 것이 계급의 발생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 만할 때는
그냥 입에 풀칠하는 것으로 지나가야 하지만.
그러나 밥 먹고도 잉여 부분이 남게 되면
그걸 가지고 권력을 만드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잉여의 부분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을을 내가 사는 거죠.
권력이 생기고 계급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계급이 발생한다고 하는 건 뭐죠?
언제나 지배하는 사람이 생기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죠.
바로 애굽의 현실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애굽의 현실이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그들도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계급이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그 세상 속에서
그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에요?
그들의 신음을 들으셔요.
여기에서 얘기하는 '듣다'라고 하는 말은
그저 바깥귀로 듣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에 깊이 연민을 품고
개입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반응하셔서
이 세상과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분으로
우리에게 등장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핵심중의 핵심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그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특별히 모세가 그 하나님을 경험하죠.
떨기나무 불꽃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만나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낯선 분입니다.
모세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낯선 분이 모세에게 주는 꿈이 있어요.
"나는 내 백성을 해방하기를 원해"
모세 속에 꿈을 심어 넣어 줍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꿈을 꿀 능력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쭤봐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인간의 어떤 규정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나인 존재야."
그러니까 성경은 그렇게 만난 인간의 곤경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록된 거예요.
그런데 종교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하나님을 체험했어요.
그럼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체험이 뭐지?'
'내가 지금 뭘 경험한 거야?'
그래서 그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내면화해요.
'아, 내가 경험한 게 이런 것이구나' 라고 얘기하죠.
근데 누군가가 내게 묻습니다.
"요즘 당신 달라진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 하고 얘기할 때
그에게 나의 경험을 설명해야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죠?
언어로 표현된 것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으로 등장했어요.
성경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체험이 먼저 있고
그리고 하나님 체험을
나의 내면 속에서 내면화하는 성찰의 과정이 있었고
그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텍스트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실 문자예요.
그러나 그 문자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문자를 통하여서 우리가 당도해야 하는 것은
그 경험 세계라고 얘기해야 하겠죠.
애초의 경험, 거기로 가야 하는 거죠
성서 문자주의에 우리가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66권이죠.
그 66권 전체가 어떤 얘기냐면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경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내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예요.
그것을 언어로 외면화해놓은 게
성경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생이 그대로 솔직하게 담겨 있습니다.
믿으면서 동시에 믿지 못하는
결백하면서도 유죄인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가는
금세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하는
인간들에 관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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