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질 박선영 1부-정체성

2022. 10. 6. 06:59Leadership

다시 기독교의 심도있는 고. 대. 질.
고난에
대한
질문을 풀다.

(현재글) 1부- 정체성
https://yosiah.tistory.com/1196

2부-요셉, 시간
https://yosiah.tistory.com/1198

3부-우리에게 주신 (고난) 시간의 의미
https://yosiah.tistory.com/1199



기독교 - 고난에 대한 질문을 풀다 - 박영선 원로목사
1-1부 (0~12분까지)
https://youtu.be/MBQCFQtTqvg

고난을 풀려고 기독교에 물어보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무엇을 하실려고 만드신지?
-어떻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물음을 건너뛰어버린 것 같이,
예수 믿고 천국가는 것만 남아버렸어요.
(이야기를 풀면)
예수는 믿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의도는 이해되지 않은 채로 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핵심과 본질이 빠진...)
그러니깐 현실에서는 복 받고 사는 것 밖에는
다른 기대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자체의 타락하게 된 연유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해야 되는 것 아니야?"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해야 되는 것 아니야?"
이런 우리의 일반적 종교심이
열심히 이런 기도를 무의식중에 하게 만드는 것이죠.

"하나님, 다시는 하나님을 찾아 오지 않도록,
모든 복을 주세요"

표현하지 않지만,
결국 그 이야기 입니다. (않그런가요?)

하나님 하시는 일에는 고난이 꼭 있으시대요.
그래서 그 문제를 출애굽 사건부터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왜 고난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고,
복인가? 하는 모순과 역설을 풀어보도록 합시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다 잘 아십니다.
이스라엘이 종되었던 애굽(이집트)에서 해방을 받아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이
애굽의 종되었던 자리에서 풀려났고,
여러 기적 속에서 행복한 나라로 간다라고 하기에는
잠시 들여다봐야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백성들을 구원할 때,
그 백성들은 오랫동안 기대했고
소원했던 일로 받아들 일 수 있습니다.
노예노릇을 해야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자유를 얻어야 했었죠.

그런데 바로(그 당시 애굽 왕)가 놓아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는 바로가 항복하고 그들을 노예에서 풀어주지만...
다시 마음이 변해서 쫓아왔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의 앞은 건널 수 없는 바다이고
뒤에는 쫓아온 애굽 병사들 때문에
진퇴양난의 자리에서 백성들은 울부짖습니다.

(새번역) 출애굽기 14: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라고 원망을 하자.
모세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적인 선포를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https://yosiah.tistory.com/962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은 건너와 해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아시는데로 ....
광야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번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원망하고 실패한 역사를 가지게 됩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게 없다."
"길이 고단하다."

여러가지 상황이 그들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게도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주기도 하시고 (40여년 내내)
또 메추라기로 고기를 먹게도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셔서 (40여년 내내)
드디어 약속의 땅 앞에 섭니다.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서
가나안에 열두 정탐꿈을 보내고
그 보고를 받는 장면이
민수기 13자에 나옵니다.
그런데 들어갔던 그 정탐꿈들
열두 명 중에 열 명이

새번역 민수기 13:31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말하였다.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

그래서 그 핑계가 이제 원망으로 나오죠

새번역 민수기 14:3
그런데 주님은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왜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하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 불평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개역개정 민수기 14:7~8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백성 대다수가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들자
하나님이 등장하시죠.

새번역 민수기 14: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땅을 못 볼 것이다. 나를 멸시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 땅을 못 볼 것이다.

너희 믿음이 없는 너희들은 다..
광야 생활중에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광야 40여년의 방랑 생활을 하고
그 세대는 다 죽고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가나안의 땅에 들어갑니다.)

잘 아는 사건이지만...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꺼낼 때에도
백성들에게 시킨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홀로, 10가지 재앙으로 간섭하시고
바로를 굴복시키셨습니다.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이 답을 다 주십니다.

그런데 유독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들이 반항하고 원망하자
"그래 너희 결정대로 너희는 못들어간다.
너희 생애를 광야에서 마치게 된다."
라고 엄한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전에는
모든 불평에 대해서 눈 감으시고
원망에 대해서 답을 주셨는데..
왜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토록 엄격하게 판단을 내리셨는가?
하는 문제이죠.

그러니깐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적인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기려면 먼저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이 방에서 나간다는 것은,
어디 갈 때가 있어서 나가는 것이고.
갈 곳 가려면 여기서 먼저 나가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깐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는...
애굽에서 꺼내는 것은 하나님이 꺼내셨지만,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는 우리 힘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이 갖는
중요한 메시지 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는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문제는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만,
이렇게 해방된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너희 스스로가 대답하도록 풀어나가야 한다.
라는 문제가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사랑과 믿음입니다.
세상에서도 가치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왜 대표되는 것을 사랑과 믿음일까?
묻지고 따지지 않고
맞는 말이고 좋은 말로
기대하는 개념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동등한 인격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깐 사랑과 믿음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열등하거나,
종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깐 사랑을 하고, 믿음을 가질려면.
둘이서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만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대등한 지위라는 것은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관계성의 대등한 지위 입니다.

그러니깐 믿음과 사랑은
상대가 서로다 자발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혹은 사랑이
신앙의 순종이 하나님 앞에
나를 포기하고 맡기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십시요.
이렇게 사용이 되는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순종 마져도 자발성을 가지고 하는 것으로 요구합니다.
자발성을 가지고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분명한 필연적 조건입니다.
그 자유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자유를 가진 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할지는
언제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요.
우리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면
우리가 정당한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할지?
이제 실력의 문제가 되지요.

선택을 하는 자유가 주어지고,
자유를 사용하는데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는데,
권리와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권리로 쓸 것이냐?
책임으로 쓸 것이냐? 는 자유가 가지는 특권입니다.

이것은 자유를 가진 존재가 선택할 문제이지요.

이 문제에서 올바르게 하였는냐?
잘못되게 했느냐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광야 생활인 것입니다.
이 광야 생활의 특징이...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8:2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8:4 지난 사십 년 동안, 당신들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시험하였을까요?
광야에서 시험받았을 때마다 외쳤던 것은
돌아가자 였습니다.
뜻밖의 반응.
돌아가자.
물이 없어서 목이 마를 때에도 - 애굽으로 돌아가자.
먹을 것이 없을 때에도 원망이 - 돌아가자.

이렇게 표현 되어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걱정할 것이 없었다) "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깐.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고달프기 짝이 없다 돌아가자~

거기가 성경이 말하고 싶은 내용인 것입니다.
돌아가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유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실력도 없는 반응입니다.

애굽의 가치는 노예로 있을지언정
먹을 것 마시는 것은 걱정이 없는 곳이죠.
광야에서의 불평은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현실이냐 하면...
자유라는 권리를 갖게 되자 생기게 되는 형편입니다.

무슨 형편이요.
이 시험. 하나님의 시험.
도전 입니다.
무슨 도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
너는 무엇이냐?
네 정체성은 뭐니?
너는 무엇이 될래?


기독교 - 고난에 대한 질문을 풀다 - 박영선 원로목사
1-2부 (12분 부터 17분까지)
https://youtu.be/MBQCFQtTqvg?t=720

무슨 형편이요.
이 시험. 하나님의 시험.
도전 입니다.
무슨 도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
너는 무엇이냐?
네 정체성은 뭐니?
너는 무엇이 될래?

이렇게 묻는 것이 광야에 나와서만 가능해 집니다.
애굽에서는 그러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주제를 다룬 아주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재밌는 영화가 있습니다.

쇼생크 탈출은 쇼생크라는 감옥을 탈출하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그러나 쇼생크 탈출은 영화 원제목이
쇼생크 리뎀션 (the shawshank redemption)

쇼생크 구원입니다.
쇼생크 감옥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쇼생크라는 이른은 이집트 왕가의 한 이름입니다.

세숑크 왕조와 성경에서 나오는 시삭
열왕기상 11: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그러니깐 쇼생크 탈출이라는 것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애굽이 구원을 얻는다라는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앤디라는 청년이 나옵니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쇼생크 감옥으로 들어오고,
그 안에 먼저 들어와 있던 레드라는 죄수를 만나게 되는데...
이 앤디라는 청년이 들어와서는 죄수들로써는 누리 못하는 태도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자유인으로 살지요.
죄수들에게는 특별해 보이는 것이.
그리고 나중에 멋지게 탈옥을 해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마치 탈옥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 결론으로 안 가고 조금 더 연장되는데..
모두가 감옥을 나가는 것이 소원이지만
감옥을 나가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모두들 체념과 원망과 넋두리들을 나눕니다.
그러는 과정증에서
한 나이 많은 종신형 죄수가 가석방을로 출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뜻밖의 자살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나갔는데, 왜 자살을 했어?"
레드가
"너희가 볼 때 저 담이 장애물로 보이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걸 의지하게 돼"

그런 알송달송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레드도 가석방을 받게 되어서
앞서 나가서 묵게 되었던 여관에
정부가 마련해 준 일자리에서 일하게 됩니다.
슈퍼마켓에 물건을 봉투에 담아주는 일을 하는데...
손을 들어서 매니져를 호출합니다.
매니져는
"뭐야"
레드가
"저, 화장실을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매니져가 이렇게 말을 하죠.
"화장실 같은데를 가는 것을 허락 받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공원 벤치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는 레드가 나옵니다.

머리를 감싸고
"나는 두렵단 말이야.
나는 평생 허락을 받고 살았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소변을) 한 방울도 내보낼 수 없었어.
나는 여기가 무서워. "
그러면서 권총 가게을 왔다 갔다 합니다.


"나는 돌아가고 싶어. 저 권총을 꺼내서, 누구 하나 쏘고 돌아갈까? "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클라이맥스는 바로 여기 인 것입니다.
여기가 (자유가 된 여기) 더 두려운 것입니다.
자유가 무서운 것입니다.
자유가 왜 무섭지요?
책임을 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존재를 책임져야 되고,
자기의 정체성을 책임져야 되거든요.
저기(감옥)는 어떤 곳이었는데요.
저기는 들어가면, 정체성이니 책임이니 다 필요 없고.
하라는대로만 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사는 곳입니다.
거기는 애를 키울 걱정도 없고
도둑질을 당할 걱정도 없고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를 찌르는...
쇼생크 리뎀션 - 애굽의 구원 입니다.
애굽이 구원되는 이야기는
우리는 애굽으로부터 구원 받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만 기억하지만...
애굽은 나중에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애굽도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탈출하면서...
죽음으로 묶인 세계가 구멍이 뚫리는, 열리는
그러니깐 애굽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기독교 - 고난에 대한 질문을 풀다 - 박영선 원로목사

1-3부 (17분에서 끝까지 8분)
https://youtu.be/MBQCFQtTqvg?t=1050

그러니깐 애굽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요.
고난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무슨 책임?
-책임을 질 정체성.
-책임을 질 의미와
-그 가치들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 현실이죠.
(모두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게 된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예수께 맡기면 된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러한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이해되어서
기독교인으로만 살면, 더 크게
세상은 줄 수 없는 진정한 정체성과 운명.
우리의 인생과 현실이 가지는 모든 도전들 앞에
실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즐기게 된다는데까지 못오게 되는 것이죠.
*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화의 과정에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깐 고난이 왜 있냐? (힘들게 시리...)
학교 가서 고난이 온 것입니다.
학교 갔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톰은 학교를 다니고, 그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인 허클베리 핀은 거지 입니다.
그는 학교를 가지 않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돌아다니고 싶을 때 돌아다닙니다.
톰이 볼 때에는 허클베리 핀이 더 자유스러워 보입니다.
톰 자신이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최고로 바라는 것은
허클베리 핀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복이고 자유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요.
학교를 가는 것이 인간이 훌륭해지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 훌륭해진다는 것은 학교에서는 아직 막연하죠.
공부를 잘하는 것이 훌률해진다는 성적만에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동기생들을 가진다는 것.
같은 반 급우를 친구로 갖는다는 것이죠.
굉장히 큰 것입니다.

학교는 다니면 점점 어려워집니다.
점점 복잡해지고...
자녀들이 꼭 물어보지 않나요?
"나 학교 않가도 돼?"
이거 꼭 물어봅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끝이 아니라
중학교에 가야 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끝이 아니라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길로 인도 됩니다.

공부를 잘하기는 어렵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지금 직접적으로 나한테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무슨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잘 아시는데로 사춘기를 요즘은 중학교 2학년 때 겪는다지요.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는 사춘기에 대해서는 하나도 않 다뤄주고, 공부만 다루죠.

"어느 대학까지 갈 수 있는가?"
"너는 갈 대학이 없다."

이런 꾸중 속에서 사춘기를 겪으면,
집에 가면 부모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알아주기를 합니까?
그저 급우들끼리
어쩔 줄 모르는 철없는 애들끼리.
깊은 문제를 나눠야 합니다.
자살을 논하고, 가출을 논하고,
원망하고...
"나는 왜 태어났나?" 를 원망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면~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았지만,
광야에서 방랑생활을 해야 하는 것 처럼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쩌시려고 그러시는가? "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정탐꾼을 보내었더니..
"거기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끝없는 방황 속에
세상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이나
믿는 신자들이 방황하는 것이나
동일한 방황.

정체성.
현실을 살아야 하는 이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실력
이런 것들이 없이..
끈임없이 도전과 시련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원망이고, 비명인 셈입니다.

여기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고 싶으시다고요.
하나님이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대등한 관계를
맺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성경의 말을
좀 더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체성을 묻는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묻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해야 하며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가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 혼란, 긴장,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원래 평안해야 되는 것 아니야?"
"만사형통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런 우리의 일반적인 종교심이
열심히 이런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다시 찾아오지 않게
모든 복을 주세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한테 찾아오지 않아도 됩니까?"
표현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결국 그 얘기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를 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다 인정할 테니깐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해 주시고
마음 편안하게 해 주세요."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걷는
신앙이 가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성경적 과정, 고난의 과정, 도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묻고 '어떻게' 를 묻는
하나님의 약속을 물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깨우치는 과정을 외면하게 되고
오해해서 원망과 비명으로
이 과정이 그저 그런 과정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욥기 23:10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새번역 로마서 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