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향에 닿은 희망의 끈 - 새터민 바리스타

2012. 3. 18. 01:28선교 교회이야기


기사원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53974.html


커피향에 닿은 희망의 끈

[영상에세이 이 사람 ⑧] 새터민 바리스타
탈북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 돕는 사회적 기업 ‘블리스앤블레스’
‘소름 끼칠 만큼 행복해’…“고향 발전에 한가닥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겨레  조소영 피디기자블로그
» 서울 중구 남산동2가에 자리잡은 사회적 기업인 카페 ‘블리스앤블레스’
서울 중구 남산동 2가 청어람 빌딩 1층 커피 전문점. 가게 주문대 벽에 ‘ 커피를 마시고, 인생을 바꾼다’(drink coffee, change lives)는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숨을 돌릴 만한 시간인데도 주방 안 바리스타들의 손놀림은 분주하다. 주전자를 좌우로 돌리면서 손으로 원두커피를 내리는(핸드드립) 모습은 여느 커피 전문점과 다르지 않다.

이 커피 전문점 이름은 ‘블리스앤블레스’, 우리말로 하면 기쁨과 축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새터민 지원단체인 ‘열매나눔재단’(대표 김동호 목사)이 탈북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면서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사회적 기업이다. 여기서 서울 땅을 밟기 전까지 커피를 구경해 본 적도 없던 탈북 청년 네 명이 인생을 바꾸기 위한 삶의 공작에 여념이 없다.

 

# 기중기 몰던 손으로 주전자쯤이야 했더니

“커다란 기중기도 몰았는데, 이까짓 것 주전자 돌리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함경도가 고향인 이은희(24·가명)씨가 커피 전문점 면접을 보던 순간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북한에서 은희씨는 여자로서 드물게 기중기를 운전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여자는 못한다’ 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파트 20층 높이까지 올라 기중기 운전대를 잡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은희씨다.


그러나 지난해 온 가족과 함께 고향을 빠져나온 은희씨가 서울에서 할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선 “그래도 술집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탈북자’라는 딱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인터넷 카페에서 ‘커피 전문점이 탈북자 바리스타를 모집하는데, 훈련을 거쳐 가맹점의 점주도 될 수 있다’는 솔깃한 구인광고를 접했다. 이것저것 고민할 것이 없었다. 은희씨는 그렇게 블리스앤블레스의 식구가 되었다.

기중기를 운전하는 일이 담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바리스타는 쓴맛과 신맛, 단맛을 아울러야 하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직업이다. 또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라 바리스타는 항상 웃어야 하고, 표정도 밝아야 한다. 기중기 운전사와 바리스타는 남과 북의 차이만큼이나 간극이 멀었다. 은희씨는 “하루 만에 까짓 것 주전자쯤이야 했던 자신감이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또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은희씨는 “후회하지 않는다”며 “기술을 익혀서 끝까지 가면 내가 다른 탈북 동생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 이곳 카페 ‘블리스엔블레스’에는 바리스타를 꿈꾸는 4명의 새터민이 있다

# “초콜릿향 쓴물 냄새에 소름 끼치더라”

막내 정연우(21·가명)씨는 지난 3월, 카페가 생길 때 들어온 네 명의 탈북 바리스타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1기생이다. 그래도 북한의 한복판인 평양에 살았던 연우씨는 서울에 오기 전 커피를 마신 경험이 었었다. 비록 “너무 맛이 없어서 다시 먹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연우씨는 커피를 ‘쓴물’이라고 불렀다. 색깔도 냄새도 비슷한 쓴물을 수십 가지로 구별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연우 씨는 “아쿠아 블루는 초콜릿 향이 나고 이가체페는 과즙 향이 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똑같은 커피에서 그런 향이 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더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교육 석 달째 아침에 내린 커피에서 초콜릿 향을 맡았다. 연우씨는 “열심히 하니까 향도 느낄 수 있더라”며 “그때 소름이 끼칠 만큼 행복했다”고 웃었다.

연우씨는 지금 집안의 가장이나 다름없다. 연우씨를 업고 두만강을 건넌 큰 오빠는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일을 못하고, 엄마는 심장 질환을 앓고 있다. 엄마와 오빠는 연우씨를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국에 데려왔는데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우씨는 ‘지금 소름이 끼칠 만큼 행복한 일’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엄마와 오빠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해서 행복하게 해줄게. 미안해 엄마.” 사춘기를 훌쩍 지난 막내는 철이 들면서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곳이 남한이건 북한이건, 연우씨 가족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다.

# 꽁꽁 연 두만강 같았던 서울생활, 우연히 찾아온 희망의 끈

» 서울의 대표적 관광명소이자 젊은이들의 거리인 명동 인근 중구 남산동2가에 자리잡은 (서울형 예비) 사회적 기업인 카페 ‘블리스&블레스’에서 바리스타(커피 제조 전문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탈북이주 젊은이들이 바쁜 와중에 잠시 짬을 내어 한데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연주(28·가명)씨는 은희씨와 같은 함경도 사람이다. 부모도 몰래 혼자서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한국 땅을 밝았다. 하나원을 나온 연주씨는 동대문 식당에서 일을 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옷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옷 가게도 문을 닫으면서 일할 곳을 잃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사회생활 넉 달째. 한국 생활은 연주씨가 건너온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그대로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아파트 창문을 올랐던 연주씨였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커피 전문점과 희망의 끈이 닿았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늦여름, 알고 지내던 사회복지사가 커피 전문점에서 탈북자 바리스타를 뽑으니 가보라고 전화를 넣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떨어져도 괜찮아. 명동이나 한바퀴 돌고 가면 되지.”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간 면접이 참으로 이상했다. 커피 전문점인데 커피에 대해선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대신 면접을 본 김일회 목사는 “앞으로 꿈이 뭐냐”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순간 ‘아차’ 싶었다. ‘머리라도 풀고 올 걸, 옷이라도 더 예쁘게 입었으면…. 이러다 좋은 기회를 놓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떠듬떠듬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도 없다. 그래도 다행히 면접을 끝낸 김 목사는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바리스타 생활 석 달째, 연주씨의 집 냉장고에는 낯선 커피 이름표가 줄줄이 붙어 있고, 지하철에선 영어 단어를 암기하듯 커피 이름을 외운다. 야무진 성격이 아니라 북한에선 철부지 큰딸 소리를 들었던 연주씨지만 적금도 붓고, 이제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을 것 같다. 연주씨는 최근 미니홈피에 ‘행복하고 싶다’고 적었다. 목숨을 내놓고 건너온 두만강,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 ‘땡해도 남자’ “고향 발전에 한가닥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 블리스엔블레스 바리스타
“지현오빠요, 띵해도 사람이에요.”

연주씨는 가게에서 제일 큰 오빠인 박지현(30·가명)씨를 소개하면서 황해도 사람이라고 놀렸다. 말문이 열린 연주씨가 깔깔거렸다.“순사 한 명이 포승줄로 100명을 묶어가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순한지 순사가 잠이 들자 가만히 기다렸다 슬그머니 깨웠더래요. 황해도 사람들이 그만큼 순해서 띵해도라 놀리는 거예요.”

순한 ‘띵해도 사람’이라 그럴까? 지현씨는 가게 동료들의 든든한 큰 오빠로서 정신적 기둥이 되고 있었다. 가게에서 서울 생활을 가장 길게 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그다. 탈북 청년이 교육 과정이 전혀 다른 한국의 대학을 졸업한 것만으로도 그는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은 눈치였다. 게다가 동생들이 막차를 놓칠까 봐 장사 뒷설거지를 혼자 도맡아 하는, 마음 씀씀이도 영락없는 띵해도 사람이다.

가게의 터줏대감 행세를 하지만 지현씨도 아직 커피 냄새가 낯설다. 맛을 보려면 계속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머리가 아프고 속도 쓰리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나는 날이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도 지현씨는 “바리스타로 최고가 돼 성공하고 싶다”는 꿈이 야무지다.

그가 그토록 한국에서 성공을 열망하는 이유는 뭘까? “똑같이 주민등록증을 받고 똑같이 세금을 내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우리를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건 꼬리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해서 성공하자고 생각해요. 우리 같은 사람이 성공을 해야 통일이 되든, 어떻게 되든 나중에 고향 땅에 갔을 때 고향 발전에 한 가닥의 보탬이라도 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부담감을 안고 살아요.”

서울 한복판 새터민 바리스타들은 인생을 바꿀 꿈을 꾸며 오늘도 쓴물을 내리고 있다.

 

영상·글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