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란 단어, 말... 그 정의를 성경속에서 다시 되새겨보면서...
앞으로 복음이 세상에 선포케 되는 것을 구도적으로 조명한 글을 포스팅합니다.
주를 영접하는 방해하는 악한 세력-세상으로써의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영적 전쟁만 다루시는 분들 보다는 침착하면서 논리정연하고도 주님을 도움을 선언하는 복음주의 신학자의 필력를 영향받을 수 있는 좋은 믿음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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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 르네 빠딜라 저> 중에서..
세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
신약성경, 특히 구원의 문제를 다룬 사도 요한과 바울의 기록들 속에서, 세상이란 용어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복음의 우주적 차원을 잘 증명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은 단순히 개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복음과 세상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구원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한 구원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이 주제에 관한 서론으로서 신약성경에서 복잡하게 쓰인 세상(Cosmos)이라는 용어가 지닌 다양한 의미를 간략하게 분류해 보고자 한다.
1. 세상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시고 언젠가 재창조하실 창조세계의 총체, 즉 우주, "하늘과 땅"이다.
신약성경의 세상에 대한 개념은 기독록을 강조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요한복음 1:10) 창조된 것 가운데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한복음 1:3) 구원의 집행자로서 복음이 선포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집행자이시다. 또한 그는 모든 창조세계가 지향하는 목표이며(골로세서 1:16) 모든 실재, 즉 물질적 실재뿐 아니라 정신적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이시다.(골로세서 1:17)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최종 운명에 대하여 비관적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적절한 때에 만물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두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에베소서 1:10, 고린도전서 15:24 참조) 복음은 '새 하늘과 새 땅' 에 관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베드로후서 3:13 참조)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참된 복음전도는 예언자들에 의하여 약속되었고, 또한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물의 회복이라는 최종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3:21) 영혼의 미래 구원을 강조하는 종말론은 이 시대의 세속적 종말론과 비교해 볼 때 지나치게 편협한 것임이 드러났다. 이 시대의 세속적 종말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로서 그것은 이상사회 건설과 새로운 인간 창조를 기대한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그 어떤 유형의 헛된 소망도 제시할 수 없었던 힘과 확신을 가지고 그 본래의 내용대로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2. 다소 제한된 의미에서, 세상은 시,공간으로 제한된 삶의 구조, 즉 현재의 인간 실존의 질서를 말한다.
이것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는 세상을 의미하며, 그 세상 안에서 인간들은 쉽게 삶의 목표가 되는 '물질'에 관심을 갖게 된다. (누가복음 12:30) 이와 같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누가복음 12:22~31) 인간이 이 땅에 쌓아둘 수 있는 보물들은 결국에는 없어실 것들이다. (마태복음 6:19)
인간이 '온 세상' 을 얻고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누가복음 9:25, 요한복음 12:25) 기독교적 현실주의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디모데전서 6:7)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질의 소유는 결국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는 이 세상의 무상함을 보여줄 뿐이다. 종말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질서에 속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그것은 인간 실존의 총체로 여겨질 수 없다.(고린도전서 7:29~31 , 요한일서 2:17) 그와는 반대로 그것들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 체제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주제는 후에 다시 다루게 될 것임).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요한복음 18:36)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정치는 이 세상 나라의 정치와 같을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정치는 이 세상 나라의 정치와 같을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왕은 사랑에 기초한 자기 자신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천하만국과 그 영광"(마태복음 4:8, 누가복음 4:5 참조)을 거부하신 분이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 가운데 임해 있으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위로부터, 즉 인간 실존이라는 일시적 영역을 초월하여 있는 질서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현된 나라다. (요한복음 8:23)
3.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항하고 악의 권세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류, 즉 복음선포의 대상인 인류를 의미한다.
때때로 코스모스(Cosmos)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 없이 단순히 인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자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을 이루는 구원사와 관련한 인류를 의미한다.
a. 복음의 대상으로서의 세상: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안에서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구원론의 우주적 성격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디모데전서 2:4)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종파의 구세주가 아니라 "세상의 구주"(요한복음 4:42, 요한일서 4:14, 디모데전서 4:10) 이시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요한복음 3:16)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요 세상의 빛이며 (요한복음 1:9, 8:12, 9:5) 또한 자기 백성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요한일서 2:2, 고린도후서 5:19 참조) 화목제물이 되셨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아버지께 보냄을 받았다.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 (요한복음 3:17) 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은 명백하게 우주적 성경을 띤다.
그러나 이 복음의 보편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하여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앞에서 그들의 현재 위치와 상관없이 영생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보편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은 복음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것은 복음 안에서 또한 복음을 통하여서만 주어질 수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이미 완성된 사실을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믿음에의 부름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선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세상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드리신 그분을 신뢰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음과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믿음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가 되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자기 확인의 이중적 과정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들에 대한 인정 없이는 복음을 온전하게 해석할 수가 없다.
복음이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복음전파 사명 역시 보편적 성격을 가진다. 복음이 세상 전체를 선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셨으며 제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지속되고 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요한복음 17:18)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의 용서가 모든 나라에 선포되어야 한다.(누가복음 24:47, 마태복음 28:19, 마가복음 16:15) 이와 같은 복음의 요구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는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14)
b. 하나님께 대항하고 어둠의 권세의 노예가 된 세상 :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Cosmos)는 대부분 부정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인류를 의미하는데, 그 인류는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적대적 입장을 취하는 인류를 의미한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대적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 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요한복음 1:10) 그는 세상의 빛으로 (요한복음 8:12, 9:5)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다. (요한복음 18:37)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복음 3:19) 그것은 집단적인 거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당연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일관된 태도일 뿐이었다. 즉,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을 수 없으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8:7) 이것이 세상의 비극이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요한복음 15:18,24 ; 요한일서 3:1,13) 그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요한복음 9:39~41) 세상을 위하여서는 기도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17:9) 요한과 바울의 저술들에 나타난 세상이라는 개념을 좀 더 깊이 분석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배후에는 인간과 하나님을 대항하는 영적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다." (요한일서 5:19)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시대의 지배자' 즉 어두움의 권세의 지혜를 반영한다. (고린도전서 1:20 ; 2:6,8 ) 불신자들이 복음에 대하여 눈이 먼 것은 "이 세상의 힘", (고린도후서 4:4) 즉 사탄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에베소서 2:2)에 의해 조정되는 시대정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초등학문(갈라디아서 4:3, 9 ; 골로세서 2:8, 20)과 정사와 권세 (로마서 8:38 ; 고린도전서 15:24, 26 ; 에베소서 1:21 , 3:10 , 6:12 ; 골로세서 1:16 , 2:10,15)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모습은 신약성경 전체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현시대는 1세기 유대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탄과 그의 군대가 세상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는 기간으로 간주된다. 우주는 모든 현상을 자연적 인과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폐쇄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를 막고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영적 권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격전장이다.
사탄의 세력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단순히 신약시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묵시적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다. 에밀스토퍼(Emil Stauffer) 가 말한 대로 "초대교회에 있어서 마귀론을 배제한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귀론이 없으면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전적으로 인간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여 있으며 그에게 파괴적인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어떤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이다. 죄는 각 개인의 죄들을 합한 합계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인간이 놓여 있는 상황을 조정하며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드는 객관적 상황이다. 즉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요한복음 8:34) 죄의 본질은 거짓이며, 거짓의 기원은 마귀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다. (요한복음 8:44) 따라서 죄는 개인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으며 더 나아가 우주적 성격을 띤다. 개인적인 죄, 즉 예수님께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언급하신 죄들(마가복음 7:21,22 )은 , 허무한 데 굴복하였으며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게 될(로마서 8:20, 21) 피조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불행하게도 사탄은 주로 귀신들리는 것이나 주술의 영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우리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건지우는 시대정신에도 마귀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구원을 개인적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한일서 2:15~16) 을 무시하고 죄를 개인적 차원에서 파악한 신학의 결과다. 한마디로, 그것은 물질주의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이 시대가 제공하는 모든 것, 소비재 상품들, 돈, 정치권력, 철학, 과학, 사회적 신분, 인종, 국가, 성, 종교, 전통 등 그 모든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니버(Neibuhr)가 말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 집단 이기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 속에서 원하는 것들을 실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세뇌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님같이 됨으로써 실존의 의미를 찾는다는 거대한 거짓을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은 어둠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요한복음 3:17 ,12:47 참조) 그런데도 세상은 인간 안에 육신을 입고 들어오신 생명의 빛을 거절함으로써 심판을 받았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한복음 3:19, 12:48 참조)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개별적인 죄를 범했거나 특정한 악의 유혹에 굴복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폐쇄체제, 즉 인간으로 하여금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절대적인 것을 상태화하도록 만드는 체제,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영생을 빼앗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들어가도록 만드는 체제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이다. 복음전도가 인간의 현실참여에 대한 언급 없이 단순히 교리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확신이 그가 갖고 있는 방법론의 효율성에 달려 있지 않음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 (에베소서 6:12 )이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이 싸움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