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9. 15:05ㆍ선교 교회이야기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 르네 빠딜라 저> 중에서..
복음전도와 세속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이 세상 임금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는 치명적인 상처, 즉 더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창조세계가 헛된 것에 복종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에 대한 그의 통치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피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을 받을 것이다. (로마서 8:20, 21) 전체 우주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2:9~11)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역사의 마지막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과 관련하여 실제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교회에 대하여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인간들(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에게 행사하는 엄청난 영향력이 실제로 존재함을 가르쳐 준다. 세상과 세상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의 지적 동의를 요구하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야만 하는 사실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라는 예수님의 주장과 함께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요한일서 5:4) 는 신자들의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그의 신분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복음주의 윤리에서의 명령법은 복음 안의 직설법과 함께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 시대가 진행되는 한 어두움의 권세에 대항하는 싸움은 지속된다. 세속화는 끊임없이 교회와 교회의 복음전파 사역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속함을 받았음에도,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가 굴복하고 있는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으로 돌아갈 위험과 또한 아직도 세상에 속한 자들처럼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골로세서 2:20~22) 고 한 인간의 의문에 스스로 종노릇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끊임없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새 시대에 속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여기' 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이 제공되었다. 따라서 모든 율법주의는 세속화, 즉 어둠의 권세에게 종노릇하는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복음주의 기독교문화' 의 일부가 되어버린 많은 금기사항과 터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와 같은 금기사항과 터부들은 복음과 미묘하게 혼동되어서 복음주의가 마치 어떤 종교적 규칙들이나 관행들을 지키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복음의 본질인 자유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의 삶과 사명에 침투하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세속화는 복음을 '시대정신'에 맞추는 일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예를 들고자 한다.
a. 세속적 기독교 : 이미 1세기에 영혼과 물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복음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 결과,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 소위 가현설로 알려진 사상이 나타났다. 즉,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 시대정신 속에서, 속성상 선한 존재인 하나님이 속성상 악한 물질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새로운 기독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아마도 요한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단사상이 그와 같은 사항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영혼과 물질 사이의 이원론이 아니라 세속주의다. 이 세속주의는 다른 유형의 이원론이 가져온 논리적 결과로써 자연계는 총체적인 현실을 나타내 보여주며, 따라서 유일하게 가능한 지식은 '과학적' 지식뿐이라는 사항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의 철학은 인간(사유하는 주체)과 세상(사유의 대상) 사이의 이원론이다.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고 자연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끼어들 자리가 없어졌다. 우주 안에서 존재하거나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경험적 방법으로 탐구될 수 없는 것은 실재적 존재가 될 수 없다.
현대 신학자들이 지향하는 세속적 기독교의 여러 형태들은 세속주의의 타당성을 가정한다. 그들이 보통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 인간들이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더는 초자연적 실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자연적 실재는 종교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이다. 그들 현대 신학자들의 목적은, 이 세상 안에서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고 초자연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복음을 새롭게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관의 일부였던 초월이라는 낡은 교리는 종말을 고할 때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기독교신앙이 살아남으려면 현대식으로 포장해야 한다. 즉, 기독교신앙은 초월주의의 모든 찌꺼기를 벗어버리고 세속적 용어로 다시 새롭게 서술함으로, 과학 이전 시대의 개념들과 함께 쓰레기통에 던져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기독교신앙의 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동반자이다. 왜냐하면,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이 주장한 것처럼, 세상을 향한 인간의 책임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더는 자연의 영역을 초월한 실재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세속도시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하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체자이며 그의 소명은 전적으로 역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로버트 블레이키(Robert J. Blaikie)는 '세속적 기독교'의 저변에 깔려 있는 데카르트적 현실관에는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관이 전혀 설 자리가 없음을 자세하게 논증하였다. 즉, 자유롭게 행동하거나 자신의 의지로 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관이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행동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사유하는 주체에 불과하며,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폐쇄체제 안에 완전히 갇힌 것으로 인간의 사유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것은 인간이 인격적 실재가 아니며 활동하는 존재로서 여겨질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인간은 세상 안에 살며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들이며, 현실이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객관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현실관은 불완전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관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철학적 전제들에 기초한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세속적 기독교는 복음을 새롭게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현대 세속주의의 한 모습인 왜곡된 현실관에 굴복한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창조세계를 향한 인간의 핵임은 인간의 소명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것, 즉 자연과 인간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배제한 것은 시대정신과 타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화의 한 형태다. 세속적 기독교는 인간 중심적 종교로 인간이 듣기 원하는 것만을 말하는 종교다. 즉, 인간은 인간 자신의 주인이며, 미래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은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비인격적인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인데,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초월하여 계시며 또한 우주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신다는 기본적 전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속적 기독교가 하는 일은 세속적인 것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세속도시의 상품들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했으며 마치 현재의 질서가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가현설에 위협 받던 1세기 교회에 준 요한의 충고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5)
b. 문화 기독교 : 세속적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기독교를 문화 혹은 문화적 표현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16세기에 라틴아메리카는 스페인의 가톨릭 왕과 왕비의 이름으로 정복되었다. 이것은 군사적인 정복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정복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스페인 문화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를 이식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최근에서야 로마교황청이 라틴아메리카 민중 속에 자리 잡은 기독교가 대부분 명목뿐인 기독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기독교 선교 활동이 유럽 식민주의와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기독교는 백인들의 종교와 동일시됐다.
그러나 오늘날 또 다른 형태의 문화 기독교가 세상에 지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식 삶의 방식'이다. 이 새로운 현상은 북미 기독교 작가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사회,정치적 보수주의를 복음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세상과의 일치이다. 우리는 미국주의와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여겨왔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우리는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반드시 미국식 제도를 채용해야 한다고 믿게끔 되었다. 우리는 이제 거의 무의식적으로 미국식 삶의 방식이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사회,정치적 보수주의와 복음주의를 동일시함으로 말미암아 상당 수의 중산층 백인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교회는 사회 안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틸리히가 말한 '개신교 원리' , 즉 모든 역사적 절대화를 거부하는 능력은 문화 기독교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많은 복음주의자가 기독교적 정통과 사회,경제적 또는 정치적 보수주의를 혼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기독교가 소위 '선교지' 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전파되는 복음이 '미국식 삶의 방식'이라는 간판을 달고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남미에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복음과 미국주의를 동일시함으로 말미암아 제기되는 수많은 편견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몇몇 형태의 미국 기독교에 의하여 투사된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행복을 위한 공식, 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나누기를 원하는 공식을 발견한 성공적인 사업가의 이미지다. 여기에서 기본적인 문제는 종교를 상품으로 하는 자유, 소비자의 시장에서 기독교가 더는 독점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이 기독교는 모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선택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안을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복음은 일종의 상품으로 변해버렸고, 교회는 그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에게는 가장 고상한 가치들, 즉 인생에서의 성공과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장해 주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는 아무런 대가 없이 '좋은 인생' 이라는 인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십자가는 전혀 반발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변질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을 강조할 뿐이며 제자도에 대한 부름은 빼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기독교의 하나님은 '값싼 은혜'의 하나님이다. 즉, 끊임없이 주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는 하난미, 가장 적은 노력을 들여 가장 손쉬운 해결책을 찾는 법칙에 의해 조종되는 대중적 인간을 위해 편리하게 조작된 하나님, 진통제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다.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교인을 확보하고자 문화 기독교는 그들의 복음을 하나의 상품으로 변질시킨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있다. 문화 기독교는 가장 많은 수의 종교 소비자들에게 그들의 복음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20세기는 완전한 도구, 즉 기술을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전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전략은 단순한 수학적 계산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문제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적은 비용을 투자하여 가장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많은 전략가가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었고, 덕분에 과거 어느때보다 기독교신앙을 하나의 통합된 문화로 창출해 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시대의 문화 기독교는 전세계에 성공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그것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고도로 발달된 기술자원을 갖추고 있다.
물론 복음전도에 기술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기술도 과학이나 돈과 같이 도덕적으로 중립이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도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디모데전서 2:4) 이 문화 기독교의 문제는, 복음을 성공을 위한 공식으로 축소시켰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를 가장 많은 수의 회심자를 얻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기술 지향적 사고에 의해 철저하게 조정되고 있음이 분명한 인간 중심적 기독교다. 이와 같은 사고는 자끄 엘뢸이 지적한 대로 효율성을 절대적 기준으로 여기며, 그것을 기초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미리 산출된 결과들을 얻기 위하여 방법과 자원을 조직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문화 기독교는 인간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것도 기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문명이 낳은 종교적 산물이다. 이 문명은 하나의 최선의 방법을 추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며, 결국에는 자동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 또한 다른 형태의 세속화다. 성공적인 결과들을 달성하려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불가피하게 이 세상과 세상 권세에 종노릇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세속적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 기독교와 관련된 기본적인 질문도 복음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이 기술 지향적 사고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복음전도에 대한 그 어떠한 비판도 소 귀에 경 읽기 식이 되거나 아니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이 결여된 것으로 매도되어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추세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선교 전략가들이 스키너의 '행동 조정방식'을 채용하고 환경이나 인간의 유전에 대한 과학적 통제방식을 채용하여 세상을 기독교화하려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로 선포하는 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또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9)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에 대한 개념을 잃어버린 곳에서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 또한, 회개가 없는 곳에서는 구원이란 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구원은 폐쇄된 체계인 세상에서의 해방이고, 사회학의 영역에 갇히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세상에서의 해방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유롭고 측량할 수 없는 활동을 배제하는 세상에서의 해방이다. 이 세상의 친구가 되는 자는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다.(야고보서 4:4)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2:15) 따라서 복음은 이 세상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믿음과 회개로의 부름이다.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분량만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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