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0. 09:29ㆍ로뎀나무/세번째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폴 틸리히(Paul Tillich)>
(현대의 가장 절박한 위기인 무의미와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제시)
'용기의 개념'으로 인간의 상황을 유용하게 분석한 책!
"빛나는 사상, 풍부한 예증, 적절한 개인적 적용은...
이 책을 읽어 나가는 일을 기분 좋은 경험으로 만들어 주었다."
- 노르만 피텐거
"명확하고 정돈된 생각 그리고 명료한 저술은
틸리히의 연구에 현저하면서도 읽기 쉬운 것이라는 특징을 부여해 주었다."
- 아메리칸 스칼러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틸리히는, 고전적이고 심오한 통찰력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현대인들이 빠져 있는 딜레마를 설명하고 불안의 문제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책은 하버드대 기독교윤리학 교수인 피터 고메스(Peter J. Gomes)가 쓴 새로운 서문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이 처음 저술된 이후부터 오랜 세월 동안 종교적 차원을 넘어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끼쳐 온 영향력에 관해 설명했다.
서문
폴 틸리히처럼 현대 세계의 마음과 관심을 휘어잡는 능력을 지닌 신학자는 거의 없었다. 그는 20세기 중엽, 사려 깊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사로잡고 있던 영혼과 마음을 위기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말했다. '지식인들의 사도' 라는 호칭까지 얻은 틸리히는 무수한 저술들 - 처음에는 독일어로 나중에는 영어로 - 을 통해 새로운 신학 용어들을 제공하였고, 그런 용어들을 바탕으로 현대 세계가 죽음과 무의미와 대치하며 얻게 된 심각한 불안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를 따르던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자들의 신학자' 라고 칭송받던 그는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많은 부분에 접근하지 못하고 관련성을 찾지 못하던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틸리히는 새롭고 역동적인 신학 용어들을 창조하여 현대 사회가 지닌 불안의 위기를 진단했으며, 신학을 학문에서 해방시켜 현대적인 담론 속에서 새로운 청중과 새로운 관련성이라는 두 영역에 전달해 주었다.
틸리히(Paulus Johannes Tillich) 는 1886년에 독일에서 출생했고 베를린, 튀빙겐, 할레, 그리고 브레슬로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21년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나치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한 1933년까지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미국의 동료들에게 존경받던 그는 라인홀드 니버로부터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쳐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유니온 신학교에서 1933년부터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후 퇴임하여 하버드대학교의 석좌 교수로 초빙되었다. 1962년에 하버드대학교를 퇴임하고 시카고대학교로 옮겨 1965년 사망하기 전까지 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저술들 가운데 1952년에 출간된 이 책(The courage to be)은 틸리히 사상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 틸리히는 그 전까지 신학과 철학이라는 특정분야에서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아 왔는데, 이 책의 출간과 더불어 일반 문화계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었고 미국의 지식인 계층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 책은 필독처럼 여겨졌고, 삶의 의미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록하는 자리에 반드시 등장했다. 또 이 책으로 인하여 충격을 받은 종교서적 분야는 20세기에 더 이상 다른 책의 출간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 책은 대학의 필독서 목록을 빠짐없이 올랐고, 신학적인 대화에서는 항상 이 책의 제목이 거론되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에서 테리 재단(Terry Foundation)의 후원으로 열린 몇 편의 강연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재단에서는 "과학과 철학의 조명으로 바라본 종교"라는 주제로 강연할 것을 요구했지만, 틸리히는 "용기의 개념"을 강연 주제로 삼았다. 왜냐하면 용기가 신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문제들이 집중되는 개념이므로, 인간의 상황에 대한 유용한 분석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틸리히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용기란 도덕적 실체(reality)이지만,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 그 자체의 구조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용기가 도덕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용기란 틸리히가 무의미와 불만이라는 현대의 가장 절박한 위기를 점검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
그는 미국 문화와 종교 생활의 가장 역설적인 시기에 강연했다. 전후 회복이 잘 진행되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전쟁에 승리하고 경기 불황을 물리쳤다는 문화적 낙관주의가 발흥하고 있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모든 사람들의 야심인 동시에 현실이 되었다. 미국은 이제 자유 세계의 수호자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자기 만족과 안전에 대한 인식과 확신이 퍼져 나갔다. 이처럼 갑자기 상승 곡선을 타게 된 문화는 종교 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교회의 출석률이 급증하고 교회 건물을 신축하는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타임(Time)지는 그것을 미국의 종교적인 '거대 건물 콤플렉스' 라고 불렀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미국에서 가장 큰 공공장소를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차게 했고,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은 여러 해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갔으며, 풀턴 쉰(Fulton J. Sheen)은 텔리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서 코미더언인 밀턴 벌(Milton Berle)만큼 인기가 있었다. 하버드대학교에 새로 취임한 젊은 총장 나단 마쉬 퍼시(Nathan Marsh Pusey)는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Jr.) 에게 받은 수백만 달러의 기금과 새롭고 활동적인 신학자들을 투입함으로써 거의 폐쇄 직전까지 갔던 신학부를 다시 살려 냈다. 틸리히도 1955년에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진에 합류했고, 1959년 3월 16일에는 그의 사진이 타임지의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미국의 종교, 특히 그 가운데 기독교는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서 전성기를 누렸고, 마치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틸리히는 미국이 당시에 누리고 있던 신앙적인 부흥의 깊이나 영속성에 대해 그리 확신하지 못했다. 1950년대 신앙적 부흥이 한창이던 때, 그 당시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잡지인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Saturday Evening Post) 1958년 6월 14일자에 "종교 속의 상실된 차원" 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틸리히는 그 기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일 우리가 종교를 무한한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지금 시대의 인간은 그러한 무한한 관심을 상실했다. 종교의 새로운 부흥은 이미 상실한 것을 다시 얻으려는 절망적이고 무모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틸리히는 대중적인 경건의 표현과 교회 건물 신축 붐에 쉽게 감동받지 않았다. 그것은 틸리히가 이 책에서 다시 언급하는 "종교 속의 상실된 차원" 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적인 전문화가 달성되고 지식 사회에서 종교가 주변화되며 종교적인 개념들을 강제로 내몰려고 하는 지금 시대에, 신학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신학자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대우받기란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폴 틸리히는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문화 전반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타임>지와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의 발행인들은 지면을 틸리히에게 할당해 주면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비록 틸리히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출신 '박사 교수님' 이었다. 키가 크고 품위 있게 흐트러진 머릿곁을 지닌 그는 나직하고 묵직한 독일식 악센트로 신학의 답변을 말해 주었다. 마치 과학계의 앨버트 아인슈타인 처럼, 그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저명한 지식인이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틸리히는 비판적이고 논리를 분명하게 전개하는 문화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전국의 새로운 청취자들에게서 당시의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어냈다. 학생 시절에 틸리히의 강의를 듣고 그의 책을 읽은 새로운 세대는 종교와 철학 분야의 교수로 미국 내의 대학과 신학교에 진출하면서, 폴 틸리히의 작품을 자신의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자 그의 이름은 대학 강의 요람에 자주 등장했고, 그때부터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52년에 테리 재단 후원으로 진행하던 강연 내용을 이 책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후에, 틸리히는 말 그대로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책은 모든 대학의 추천 도서 목록에 올랐다. 그의 작품은 대학에서 종교에 관한 자유 토론을 위한 자료가 되기도 했다. 설교가들과 교수들도 그 책에 담긴 내용들을 마음껏 인용했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런 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는 꼭 읽어 보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는 책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1961년 베이츠대학 1학년 대 '종교 101' 과목의 추천도서 목록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폴 틸리히는 나를 가르친 교수님의 교수님이었다. 그 교수님은 폴 틸리히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당시 세대에 속한 모든 신학자들이 그와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예일대학교 출판사가 틸리히의 책을 새롭게 발행하면서 내게 서문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무척 기뻤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고 살펴보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신학책에나 최상의 제목으로 여겨질 용기와 실존이라는 흥미로운 개념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 변증가의 눈으로 읽어 나갔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책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현대적인 의미가 전혀 없을며, 이해하기 곤란한 것, 즉 한마디로 말해서 과거 시대의 소산물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아주 놀랍고 기쁘게도 그러한 염려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현재 미국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 신앙적 활력의 외면적인 징후들이 표출되고, 대통령 후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들의 친밀함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린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의심과 의미의 구름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신앙의 행진 대열 위에 비를 뿌린다. 지금 시대는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과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고, 미국의 대통령보다는 연방 준비 은행(Federal Reserve Bank)의 총재를 맡은 사람들이 더 깊은 신앙이 있는 때이기는 하나, 문화의 중심부에는 예사롭지 않은 걱정스러운 불안감이 항상 남아 있다.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여가를 즐기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선조들보다 더 근면하거나 쉬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불안과 공포의 소리에 압도되는 고요함 속에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톰 울프(Tom Wolfe)의 냉소적인 표현대로 겉으로는 '우주의 지배자들'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자신의 수필 "유원지" (Pleasure Sports)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등불은 꺼지지 말고,
음악은 항상 연주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테니,
음침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어둠의 공포에 질린 아이들은
행복과 선함을 전혀 알지 못한다.
틸리히는 이러한 실존적인 의심의 상태에 대해여 말했으며,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책의 제목을 정의하고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본문 마지막 226 페이지).
이러한 개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주변 상황이 희망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절망의 때에 나타나는 희망이다. 이처럼 복잡한 개념은 1900년대 초에 흑인 시인이더 웰든 존슨(Weldon Johnson)이 예기하였다. 그는 '모든 목소리와 노래를 높여라' (Lift Ev'ry Voice and Sing)라는 자신의 시와 노래에서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희망이 사라져 버린 때' 에 흑인들의 끊임없는 희망에 대하여 말했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종교란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다윈(Darwin), 프로이트(Freud), 마르크스(Marx)는 신적인 가설(假設,hypothesis) 없이도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심지어 바람직하며, 또한 그렇게 보이는 세상을 창조해 냈다. 그로 인한 결과는 행복이나 자유가 아니라 불안과 공포의 속박이었다. 상급으로서 천국이나, 형벌로서 지옥이 없다면, 혹은 하나님이 다름 아닌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면, 과연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세속적인 질서가 신적 질서의 복사물이나 기대치가 아니라면, 도대체 질서라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실제로 이러한 현대성의 정황 속에 있는 질서 그 자체는 존경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거짓 신에 불과하지 않은가?
현대성에 대한 종교적인 반응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신념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진실성의 기준에 조화되도록 애쓰면서 '모더니즘'이라는 신학적 견해를 만들어 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성을 철저히 거부하고 감정적인 에너지와 합리적인 논증을 통하여 현대 이전의 근본 원리에 절박하게 호소하는 입장으로서 소위 '근본주의'라 부르는 신학적인 견해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세속적인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와 동일한 딜레마에 두 가지 모습으로 반응한다. 첫째는 공산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환경 속에서 집단적인 문화적 절대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둘째는 20세기의 미국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 속에서 체제 순응적인 문화적 절대주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세속 현대주의의 승리에 대한 지적인 반응의 대부분은 '실존주의'라고 알려지게 되는 철학적, 문화적 입장 속에서 발견된다. 실존주의는 개인과 하나님 혹은 우주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는 일련의 철학적 주장들이다. 그러한 주장들은 현대 이전 시대에 서구 신학 속에서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인 형이상학적 확실성에 대한 반항을 공유하고 있다. 근본적인 실존적 물음은 의미와 목적과 질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을 배격한 실존 속에서 개인적인 의미와 목적을 구하는 근본적인 질문들과 관련되어 있다. 혼란과 절망을 대신할 대안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어떻게 그 대안을 발견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현대 상황의 문제점이다. 그는 '실존주의'를 단순한 태도가 아닌 내용으로 이해했고, 주의를 기울여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세 가지 의미로 구분했다. 그는 관점으로서의 실존주의, 저항으로서의 실존주의, 표현으로서의 실존주의 등으로 나누었다. 관점으로서의 실존주의는 신학에서 가장 많이 제시되었고 예술, 철학, 문학에서도 다분히 드러났다. 의식적인 저항으로서의 실존주의는 19세기 후반부 30년 동안 나타났다. 틸리히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항으로서의 실존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시대, 즉 의심과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이 풍미하고 있는 시대의 철학과 예술과 문학의 성격을 이루고 있다." (본문 163페이지)
1950년대 초에 실존주의에 관하여 들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그 용어는 전후(戰後) 유럽의 이국적인 지적 의기소침의 냄새를 풍겼다. 그것이 카뮈(Camus)와 사르트르(Sartre)의 절망적인 작품의 바탕이 된 서구 문명의 폐허에서 발생했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야만적인 도시의 건축, 피카소의 기괴한 그림, 운율을 무시한 '현대' 시, 음악의 무조성 [일정한 조성(調性)에 입각하지 않은 작곡 양식-역자 주], 사회적 협약의 전반적인 해체와 같은 모든 현상들은 과도기에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조적(自嘲的, Self-mocking)인 절망에 빠져 있는 문화의 증상들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영국의 전후 시대 극작가인 존 오스본(John Osborne)은 격노한 젊은이들의 세대를 이끌었고, 모트 샬(Mort Sahl)은 자신의 맹렬한 냉소주의의 매개체라 할 수 있는 코미디를 미국의 텔레비전에 내보냈다. 그러나 틸리히에게 실존주의는 문화의 비신성화(desacrilization)에 대한 단순한 사례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실존주의는 보헤미안적 철학자나 신경이 예민한 소설가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만든 선동적인 과장도 아니고 부정직인 것에 병적으로 집적거리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제시한 그런 모든 요소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나, 실존주의 자체는 그것들과는 다른 무엇이다. 실존주의는 무의미함으로 인한 불안의 표현이며, 이러한 불안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의 표현이다. (본문 175페이지)
틸리히는 이와 같은 설명으로 실존주의가 단순히 냉소주의의 동의어가 아님을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그는 원래 그리스의 냉소가(cynic)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로서 이성과 자연법에 기초하여 당대의 문화를 비판하던 혁명적인 합리주의자였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현대 비평가들은 그처럼 차원 높은 길을 거의 따르지 못하고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그들은 '비창조적인 실존주의'라 명명한 길을 따라간 자들이므로 어느 누구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이성에 대한 믿음이 없으며, 진리의 기준도 없고, 가치 체계도 없고, 의미에 관한 질문의 답변도 제시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규범들을 훼손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 그들은 거부하고 싶은 모든 것을 거부할 자유를 자신들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모든 해결책을 용감하게 거절한다." 현대 비평가들은 무의미함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일에 공헌하지 못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나치게 강제적인 자기 긍정과 지나치게 광신적인 자기 포기는 모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의 비창조적인 표현인 것이다." (본문 187페이지)
비판적인 절망과 비창조적인 방종으로 빠지려는 유혹을 받으며 실존주의에 직면한 존재의 용기는 "용납될 수 없는데도 용납된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용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과 루터(Luther)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의 진정한 의미이다." (본문 201페이지) 틸리히는 대부분의 직업적인 신학자들과는 달리 유능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가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식적인 강의나 저술보다는 설교에서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유명하고 인기 있는 설교 가운데 하나는, 존재의 용기의 그러한 면을 더욱 확장한 "당신은 받아들여졌다(You are Accepted)" 라는 설교이다. 그는 이 설교에서 죄가 소외 혹은 분리라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고, 인간의 상황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아로부터,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분리의 상태를 잘 알고 있으며, 더 나아가 솔직히 그러한 분리를 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틸리히는 죄를 분리라고 재정의하면서, 은혜를 용납(acceptance)으로 재정의하는 차원까지 나아갔다.
은혜는 우리가 엄청난 고통과 피곤함에 빠져 있을 때 밀고 들어온다. 은혜는 우리가 무의미함과 공허한 생애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할 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은혜는 우리가 사랑하는 생명, 즉 그로부터 우리가 소외된 그 생명을 더럽혔기 때문에 우리의 분리가 예상보다 훨씬 깊다고 느낄 때 다가온다.
그런 후에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를 어둠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빛의 물결로 묘사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목소리처럼 들려온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보다 더욱 위대하고, 네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지금 그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말아라. 나중에 그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나중에 너는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도 구하지 말아라. 어떤 일도 행하지 말아라.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아라. 그저 네가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 받아들여라! 만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 책에서 위의 개념을 "자아를 초월하는 그 무엇에 대한 참여를 전제로 하는 자아 긍정" (본문 202페이지)이라고 설명했다.
운명, 죄의식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현대의 영혼을 미혹하는 세 가지 불안이다. 운명은 의미와 목적 두 가지를 모두 볼모로 잡고 있다. 죄의식은 용서와 은혜의 원천이 부재한 상태에서 죽음을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삶에서 의미의 부재를 경험하고 상급이나 형벌에 대한 약속이 없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과거의 신학과 경건은 현대의 비판적인 불빛 아래서 더는 지속되지 못할 확신을 제공했다. 이제는 비판 능력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로 회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복잡성에 직면하여 그것을 거스르며 단순함을 주장하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지금의 상황들은 현재의 요구와 실존적인 순간을 충족하기 위하여 과거의 개념들과 생각들을 재적응시키고 재적용할 용기를 요구한다. '존재의 용기'는 그와 같은 개념적인 재적응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틸리히는 운명과 죄의식의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가 '확신의 용기' 라 부르는 것을 불러일으켰다. 진정한 믿음은 주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유지된다. 아무리 상황이 그것을 훼손하려고 하더라도 믿음은 흔들림 없이 확증된다. 당신이 성공하고 승리를 거둘 때 하나님께서 당신 편에 있음을 믿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고통당하고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 편에 계심을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증오에 직면하여 사랑을, 죽음에 직면하여 생명을, 밤의 흑암 속에서 밝은 낮을, 악에 직면하여 선을 믿는 것, 이러한 모든 태도는 어떤 이들에게 절망적인 순박함으로 여겨지며, 간절한 마음으로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틸리히가 볼 때 그러한 모습들은 대단한 용기, 즉 사실과 외양의 강력한 힘을 넘어서는 확신의 용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섭리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관한 어떤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운명과 죽음에 관한 확신 있는 용기의 종교적인 상징이다. 왜냐하면 확신의 용기는 죽음을 향해서까지도 '불구하고'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본문 204페이지) 이것은 욥이 하던 말의 메아리이다. 그는 거름 무더기와 절망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선포한다.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찬미하리라" (욥 13:15, NIV 직역, 한글 성경에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고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
신앙은 그와 동일한 특성을 지닌다. 신앙은 이론적인 주장이 아니며 하나의 견해도 아니다. 이것은 "용납됨을 용납한다고 하는 역설적인 태도의 특징"이다(본문 209페이지). 은혜가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은 '그렇지 않다' 고 알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더는 아니며, 받아들이기 힘든 교회적인 선포의 모음도 아니다. 믿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의 용납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거절과 죽음의 부정적인 세상 속에서, 용기는 틸리히가 말한 대로 비존재의 위험 속에서도 나타나는 존재의 자기 긍정이다. "이러한 자기 긍정의 힘은 용기의 모든 행동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존재의 힘이다. 믿음은 이러한 힘의 경험이다." (본문 208페이지)
틸리히에게 절대적 신앙이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 (God above God)에 대한 신앙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용기인데, 왜냐하면 그 용기는 철저한 의심, 즉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떠안고 하나님에 관한 유신론적 개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성은 유신론적 신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것은 20세기 후분의 신학적 담론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적 담론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은 죽었다."고 주장[사신(死神)신학]하는 1960년대의 신학자들을 기대하던 니체(Nietzsche)에게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God)의 죽음이 아니라 유신론적 신(god of theism, theistic god)의 죽음이었으므로, 틸리히는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을 존재의 용기를 위한 궁극적인 근거로 인정했다. 이것이 많은 혼란을 가져온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이란 개념이다.
틸리히는 틸리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현대성의 세속적인 무신론에 굴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솔직한 지적 연구가 뒷받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정한 개념에 대해 말하는 것뿐이라고 항변했다. 과학 이전 시대의 하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존 로빈슨(John A.T. Robinson)이 자신의 책 "신(神)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에서 말하는 의인화되고 개인화된 기계론적인 하나님의 개념인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은 더는 확실한 것이 되지 못했다. 틸리히에게서 개념의 붕괴가 하나님 실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적인 마음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 , 즉 우리 상상력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분을 생각하도록 장려되어야 한다. 이 처럼 '신의 죽음' 이 어떤 이들에게는 무신론과 무의미함의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되지만, 틸리히에게는 이것이 우리가 의심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 그 위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더욱 위대하고 깊은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신앙은 다른 모든 신들(gods)이 부적절하다고 판명된 후에도 변함없이 남아 계신 하나님 안에 근거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심의 저편에서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 안에서 믿음, 용기, 섭리, 소망 등이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그 의미는 과거의 싸움이나 현대성의 사소한 승리로 소멸되거나 제거될 수 없다. 틸리히는 '초월된 유신론' (본문 218-222페이지) 부분에서 이 점에 관하여 말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입장이었으며, 그는 1958년에 이사야 43장 16, 18-19절을 근거로 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했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 안에서 새로운 것은 언제나 사람들이 그것을 거의 믿지 못하는 때에 생겨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분명히 과거의 것이 오래 보이지 않는 순간에 등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틸리히의 글에 따르면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내가' 는 완전히 새로운 것의 근거를 가리킨다. 그것은 언제나 오래되고 언제나 새로운 영원자(the Eternal)이다.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이시다. 이것은 유신론의 죽음에 의해 낙담하고 자체의 파멸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고 있는 세상 속에 선포하기에 결코 사소하거나 미미한 주장이 아니다.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은 비록 감추어져 있긴 하지만, 모든 신과 인간의 만남 속에 현존하신다. 바로 이것이 그러한 만남들이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의 표명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에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1955년부터 1962년까지 폴 틸리히는 하버드대학의 석좌 교수로 있으면서 지적인 거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는 대학교의 석좌 교수였으므로 어떤 학부에서나 가르칠 수 있었다. 비록 신학부(Divinity School)에 속해 있었지만 거기에 제한받지 않았고, 오히려 문과 계통과 이공 계통 같은 일반 학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버드 대학의 메모리얼교회에서 자주 설교하던 그는 언제나 앉을 자리가 없어 복도까지 꽉들어찬 청중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틸리히는 신학자들의 신학자라고 불렸는데, 그 말은 오로지 신학자들만이 그를 이해하고 그는 오로지 신학자들에게만 말을 한다는 그릇된 암시를 담고 있다. 오히려 그의 경우에 이 표현은 그가 이룩한 신학활동이 매우 훌륭하고 멋지며 유명하여, 다른 신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칭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신학활동에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가 더 타당하다.
유명 인사로서 틸리히는 여러 면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과 유사한 모습을 띄었다. 콩코드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동부에 있는 마을로, 메어슨이 거하고 있었으며 독립 전쟁의 시발이 된 곳이다-역자 주)에 거하던 에머슨의 사상과 틸리히의 사상이 비슷하다는 말이 아니라, 소위 대중에 의해 '유명 지식인' 이라 인정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이 서로 유사했다는 것이다.유명 지식인의 인기는 자신이 지닌 사상의 복잡성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대가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식인들은 자신의 작품이 읽혀지고 자신의 사상이 겅연 등을 통해 전해질 때 인기를 얻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19세기의 콩코드에서는 농부들이 오후의 허드렛일을 일찍이 마쳤다고 한다. 그래야만 마을회관으로 가서 이웃에 거하는 에머슨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인들이 강의 내용에 대해 묻는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모르겠어, 하지만 정말 대단해!" 하는 것이었다. 하버드대학교의 메모리얼교회나 미국 전역의 무수한 대학교회와 강의실에서 틸리히의 말을 듣던 많은 학생들도 그와 동일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틸리히가 말한 내용이 반대에 직면할 것을 충분히 이해했고, 인간의 상황과 현대 문화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과 과거의 난해한 문제에 대하여 신선한 빛을 밝혀 준 그의 방식에 감명받았다. 미국의 신학자인 월터 호튼(Walter Horton)은 틸리히의 사상에 대한 대중적인 반응을 '정중한 신비화(respectful mystification)' 라 불렀다.
1948년에 틸리히는, 192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기록한 방대한 저술에서 뽑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시카고 대학교가 출간한 그 책의 제목은 "프로테스탄트 시대"(The Protestant Era) 였으며, 앞표지의 제목 밑에는 두 가지 질문이 제시되어 있었는데, 그 질문은 "기독교 문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와 "개신교는 개혁이 필요한가?" 였다. 미드빌신학교(Meadville Theological School)의 제임스 루터 아담스(James Luther Adams)가 편집한 그 책의 원래 제목은 "개신교 시대의 종말" (The End of the Protestant Era) 이었으나, 틸리히는 미국처럼 강력한 개신교와 낙관적인 전후(戰後) 문화 속에서 그처럼 비관적인 제목으로 출간하면 책이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아담스는 "프로테스탄트 시대에 대한 틸리히의 개념" 이란 마지막 글에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의 유명한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면서, 그 표현이 폴 틸리히의 작품들을 대면하는 것으로 매우 잘 어울릴 수 있다고 했다. 틸리히나 슐라이어마허가 모두 16세기 독일 신학으로의 회귀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앞선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개혁의 시기였으므로,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은 변화와 개혁을 일으킬 필요를 느낀 사람들에게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그러한 개혁들로 시작된 시대의 막바지에 살고 있다. 세계는 더는 과거와 동일한 곳이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과거 속의 사람들은 그 당시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개혁 작업은 우리 선조들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려고 한 곳을 향해 견디며 나아가는 것이다. 틸리히는 설교자, 철학자, 신학자, 문화 비평가로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같은 지속적인 개혁의 개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개혁은 인문주의와 현대성의 피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시대의 마지막에 이른 지금 더욱 필요하며 중요하게 되었다 아담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프로테스탄티즘이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이제 거의 소멸되는 상태에 이른 획기적 사건(종교개혁)의 전망과 구조에 대한 집착을 확실하게 끊어버려야 한다. 이제는 개혁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적용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 속에서 새로운 통합의 양식들을 창조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개혁으로의 부름이 틸리히의 모든 작품 배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러한 부름은 이 책에 담긴 신학적 개념 속에 적합한 모습으로 다시 사용되었다. 한 시대와 다른 한 시대 사이의 경계에서 살아간 것이 틸리히가 차지하고 있던 특징적인 지적 태도였다. 그러한 변화의 시대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학이 그와 같은 시대에 감당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지니고 있음을 경고했다. "교회가 신학의 안정성을 신성시하고 지지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위해서라면 안정성에 역행하는 결단도 내려야 한다." (본문 177페이지) 이러한 틸리히의 주장은 신학자들이 신학과 문화 사이 그리고 교회와 신학 사이의 경계에 위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프로테스탄트 시대 이후에도 개혁을 지속하고 현 시대의 체계와 상황을 중시한 것은, 그 자신이 경계 지대가 아닌 다른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다는 의미였다.
1965년 가을,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의 신입생이던 나는 폴 틸리히의 추도 예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는 틸리히에 대한 위대하고 놀라운 찬사가 이어졌다. 당시의 젊은 총장이던 나단 마쉬 퍼시(Nathan Marsh Pusey) 는 틸리히가 끼친 영향력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비록 지적이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사회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20세기의 문화적 정통주의에 의하여 믿음의 에너지에서 차단되던 사람들의 곤경을 틸리히는 매우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또 그는 깊이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는 이 시대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학자인 동시에 예술가이며 철학자였으므로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절친한 친구이며 하버드대학교의 동료 교수이던 제임스 루터 아담스(James Luther Adams)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틸리히는 평생에 걸친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로마(Rome)의 지배력이 서방에서 쇠퇴해 가던 절망적인 시대에 어거스틴이 시도하던 바로 그 일을 수행하려고 애썼다. 즉, 찌꺼기들만 잔뜩 쌓여 있는 고갈된 믿음을 회복하고 신앙적인 상징들의 능력을 새롭게 하려는 희망을 품고서 적대적인 모든 사상들과 마주 대했다. 그리하여 흩어지고 소원된 마음들이 참된 믿음을 나눔으로써 다시 한번 진정한 '궁극적 관심'으로 회귀하기를 원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됨을 깨달은 루터의 믿음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모두 알고 있는 믿음이고, 인간의 지적 그리고 도덕적 양심을 모두 '의롭게 하는' 믿음이다.
신학부에서 배포한 인쇄물에는 하버드대학교의 사회학 부교수이던 젊은 로버트 닐리 벨라(Robert Neeley Bellah)의 글이 실려 있었다. "나는 폴 틸리히에게서 기독교 신앙이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 이 아니라고 배운 많은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대한 틸리히의 정의(definition)가 적합한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정의가 적합한지는 확신할 수 없느나, 내가 예수를 내 생애 속에 궁극적인 역사를 이루신 그리스도로 깨닫도록 도운 사람은 틸리히였다."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틸리히의 거대한 영역 가운데 일부가 "존재의 용기" 라는 이 작은 책에 압축되어 있지만, 그 사상의 생명력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침식되지 않는다. 틸리히의 글이 한가한 시간에 잠깐 읽어 버릴 정도로 쉬운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요즘 널리 퍼져있는, 쉽게 읽히지만 영향력을 별로 끼치지 못하는 그런 류의 책과 병립할 수 없다. 그는 재치 넘치는 익살과 영감을 주는 즐거운 글의 수준으로 자신을 내주지 않는다. 이 책에서 심오하고 통찰력 있는 정확함으로 묘사한 현대의 딜레마는 1952년 이후로 조금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지 않았다. 이 책 "존재의 용기"는 20세기 중엽보다 오히려 새로운 세기에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상시보다 더 음울하게 되고 좀 더 박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식 도시의 편안한 낙천주의를 불신하고, 오로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쓰는 설교자들과 정치인들의 달콤한 말을 신용하지 않는 법을 오래 전부터 배워 왔다. 우리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을 쉽게 쫓겨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단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능력 이상의 것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한 생활이 아닌 진정한 생명 - 그것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자신과 다른이들의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 을 누리기 원한다. 틸리히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억누르는 세상이 지닌 힘의 궁극성을 부인했다. 틸리히가 사용한 어휘 가운데 자기 긍정이란 단지 낮은 차원의 자기 존중에 역행하는 행동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는 시대 속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나머지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거부하게 되는 일종의 자기 부양(ego-boosting)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자기 긍정이란 '자아를 초월하는 그 무엇에 대한 참여' 라는 역설이었다. (본문 202페이지).
지금처럼 피폐해진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책에 담긴 메시지야 말로 가장 시기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수백만의 새로운 독자들의 정신적 모험을 위한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존재의 용기' 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피터 고메스(Peter J. G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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