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cal] 받지만 말고 재생산하라

2019. 5. 23. 10:11선교 교회이야기/CPM

[Radical] 받지만 말고 재생산하라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세례를 주는 것 모두가 제자를 삼는 데 꼭 필요한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 즉 가르침도 있어야 한다.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삶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교제하면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곧장 교실에 앉아서 누군가의 강의를 듣는 장면을 떠올린다. 교실과 수업도 가치가 있지만, 예수님이 제자들과 교제하셨던 모습을 살펴 보면 강의실과 강사라는 환경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에게는 세상이 가르침을 주고받는 교실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곰곰히 생각할 때 그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히들 누구나 교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가르치는 능력을 성령의 은사로 규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문제를 특정한 리더가 감당해야 할 역할인 것처럼 설명한다. 따라서 가르침을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과제로 밀쳐 두기 일쑤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교사들도 분명히 있지만, 예수님이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시면서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는 일을 맡기신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가령 누구에게 다가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가 세례를 받게 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하도록 했다고 하자.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것인가? 새롭게 주님을 믿은 이는 일상생활 가운데 그분과 동행하는 법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적절한 준비를 갖춘 몇몇 교사들만 가르칠 수 있다면 새 식구에게 얼른 교실에 들어가서 강의를 들으라고 권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제자 훈련' 가운데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프로그램이 수두룩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 삼는 사역과는 한참 동떨어진 일이다. 교실에서 하는 강의가 죄다 허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새 식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기도하는 법'이란 강의에 등록해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수업을 듣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함께 경건의 시간을 갖자고 초대해서 기도하는 것을 직접 보여 주며 가르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막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을 공부하는 법을 효과적으로 알려 줄 수 있을까? 다음 학기부터 성경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란히 앉아서 스스로 배웠던 그대로 성경을 연구하는 법을 전수해 주는 것일까?

* 예수님의 전략은 적은 무리인 열두 제자의 심령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서 온 세상을 뒤바꾸려 하신 것이다.

그러자면 기독교 자체의 기대 수준을 높여야 한다.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제 힘으로 성경을 연구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부터 성경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제자 삼는 사역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다른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도록 도울 수 있으려면 일단 스스로 예수님과 나누고 있는 교제부터 한 차원 높이 끌어올려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매트(Matt)는 몰몬교를 믿는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알고 싶다며 자주 나를 찾아와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에게 나는 몇가지 자료를 추천해 주었다. 매트는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고 몰몬교의 교리와 복음의 차이를 완벽하게 파악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몰몬교를 믿는 동료들과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나누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몇 주 뒤에 매트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자료들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더 강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뚜렷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아내도 예전보다 신앙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매트는 "난 준비되지 않았어.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나서야 해" 라고 하며, 생소한 신앙을 가진 상대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을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쪽을 선택했으며, 점점 더 깊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꽁무니를 뺐더라면 누릴 수 없었던 축복이다.

나는 종종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재생산할 것인지 묻곤한다. 그 차이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지금 당신이 수단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짚으로 지붕을 얹은 오두막에 들어가서 교회 지도자들과 둘러앉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입을 열자마자 고개가 일제히 숙여진다.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끝날 때까지 누구와도 눈동자를 마주치지 못한다. 이편에서 말하는 것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받아 적느라 얼굴을 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강의가 끝나면 비로소 그들이 다가와서 말한다. "선생님, 오늘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번역해서 우리 부족에게 가르치겠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교회 지도자들은 받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생산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오늘날 미국 교회의 예배 현장으로 가 보자. 성경을 펼쳐 놓은 교인들도 있지만 아예 빈손으로 참석한 이들도 적지 않다. 펜을 들고 받아 적는 쪽은 소수고 대부분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한다. 딴생각에 빠진 이들이 드문드문 끼어 있기는 해도 대체로 설교를 열심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재생산하기 위해 경청하는 그리스도인은 몹시 드물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받아먹기를 좋아한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여기서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접근한다. 하지만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그건 잘못된 기독교다.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자세를 바꾸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 들어서 다른 이들을 가르칠 준비를 제대로 갖출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너나없이 펜과 노트를 꺼내 들 것이다. 적는 것이 훈련과 헌신의 척도는 아니지만,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메시지를 듣는다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담아 두고 싶어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면 말씀을 듣는 태도가 180도 달라질 것이다.

아울러 말씀을 듣는 청중도 달라진다. 예배나 소그룹 모임에서 들은 말씀은 갖가지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되고 교회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메시지는 더 이상 예배당 안에 갇히지 않고 공동체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마음에만 간직하려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인 나로서는 그만큼 신나는 일이 없다. 주일 아침,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꼭 내가 아니어도 좋다.) 그 진리는 예배당 안을 맴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날 저녁이면 여성 쉼터로 퍼져 나간다. 한 주 동안 곳곳에서 열리는 직장 성경공부 모임으로 퍼져 나간다. 주말에는 버밍엄 교도소와 약물중독 치료센터로 전달된다. 며칠이 지나면 교인들의 손에서 번역되어 라틴아메리카의 목회자들과 중앙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좇는 이들에게 넘어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로 작정하면 이렇게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