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영성)날아 - 미생 OST으로 보는- 완생편
2019. 8. 24. 21:04ㆍ로뎀나무/네번째
(세상영성)날아 - 미생 OST으로 보는- 완생편
https://youtu.be/ZfGzXCUqlJg
* 개똥철학일 수도 있다. 주관적 견해.
* 시사하는바가 커서 정리하고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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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영성)날아 - 미생 OST으로 보는
- 미생편
https://yosiah.tistory.com/920
-완생편
https://yosiah.tistory.com/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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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란 것을 대하는,
남다른 직장인의 진지함과 절대적 선(?)을 잘 표현한 드라마 미생이다.
"날아"에서 표현하는
미생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를
완성되지 못한, 완성할 수 없는 미생들이
그래도 날아 오를 것을 바라보고 도전하고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아낸 것으로
두번째 완생편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세 가지 주제를 담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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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준 : 완생의 기준
2. 기독교가 말하는 완생
3. 미생이 말하는 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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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준 : 완생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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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기준이란 잣대로 목표달성에 대한 평가를 매길 수 있고, 어느 정도 성취를 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완생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9%84%EC%83%9D
외부를 향한 활로가 막혀도 죽지 않는 상태의 바둑 돌을 말한다.
바둑이 말하는 완생은 적들로, 외부적으로 둘러싸여서 살아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도
죽지 않는 상태의 바둑 돌이 놓여진-포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완생의 기준이 광범위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 죽지 않는 상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상태
- 적이나, 외부적인 둘러싸인 환경에서도 살아나아갈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계속 살아있는 상태.
외부 공격(?) - 둘러싸임에도 살아있는 상태.
결국, 최종 승점이 되어서 승리에 이르는 살아있음을 말하는 완생.
이런 정리와 기준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한다.
2. 기독교가 말하는 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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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계속 살아있는 완생
2-2. 적들의 공격에도 살아있는 완생
2-3. 최종 승리에서 살아있는 완생
위의 모든 것을 다 푸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을 받는 것,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려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다 해결이 된다.
시작은 간단하다. 이 간단한 것을 말하려고 완생편을 쓴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경이 구원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는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왜 현재 기독교의 모습에서 그런 성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고, 성경도 잘 모르는 세상이 기독교를 욕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기독교의 기준을 더 잘 아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정말 민망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고도 예수 그리스도는 멈추지 않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부활과 영생으로 인도하셨다. 구원을 완성하셨다.
이 완성의 완생에는 죽음과 삶과 영원한 삶이 다 함께 연관되어 있다.
다음 성경의 사도 바울에 설명을 되살펴보고자 한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로마서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로마서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선, 단순한 구도를 좀 잡아서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대속)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죽음) .
4일만에 다시 살아나서(부활) 하늘나라에 하나님께 되돌아갔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신다(영생).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변화
(세상에 태어남) - (대속을 위한 죽음) - (부활) - (영생)
우리들의 상태 변화는 구원과 심판 두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원]::(세상에 태어남) - (죄에 대한 죽음) - (예수 그리도와 연합된 부활) - (영생)
[심판]::(세상에 태어남) - (죄에 대한 삶:종 노릇) - (심판) - (영원한 죽음)
위와 같이 간단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연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고, 믿는 다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며... 영혼을 접붙임하는 말뜻이 다 통섭되어서 사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일을 우리도 겪게 되는 연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죽음에 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으로 가지 말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으로 믿고 의로운 사람-새 생명으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이다.
10,11절에 예수 그리스도도 죄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 우리도 우리 죄로 죽임 당한 것도 믿고, 다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살아있는 자로 여겨지는 것도 믿는 것이다.
이 2가지를 다 믿어야 한다.
죄에 대한 죽음, 의에 대한 생명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셨고, 계획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이다.
(참고) 이신칭의 (以信稱義)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B%A0%EC%B9%AD%EC%9D%98
https://namu.wiki/w/%EC%9D%B4%EC%8B%A0%EC%B9%AD%EC%9D%98
믿는 것으로만 그치겠는가?
행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기독교가 가진 기준과 원리가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멀리갈 것 없이, 시작과 끝이 분명함, 존재에 용서-받아들여주는 구원을 베풀어 주심, 믿음을 넘어서 실천적 행동을 요구함. 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지금,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위의 맥락- 즉, 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쓴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계속적인 개혁이 되어야 하는 개신교(개혁주의, 개혁교회)가 맞닫들여야 하는 숙명인 부분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본받아야 한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십자가 죽음을 먼저 이루시고,
부활과 영광을 받으셨다.
그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순신 장군과 같이
살고자 하는 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이 살 것이란 복음의 대명제가.
이제 기독교가 말하는 완생의 길인 것이다.
개혁주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D%98%81%EC%A3%BC%EC%9D%98
개혁 교회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D%98%81_%EA%B5%90%ED%9A%8C
3. 미생이 말하는 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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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계속 살아있는 완생
우선 계속 살아 남아 있지를 못한다.
미생이다.
그러나 삶이란 미생으로 계속 삶을 영위해 나아간다. 결말을 보면 더욱 실감한다.
완생이 아닌 계속 살아감을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3-2. 적들의 공격에도 살아있는 완생
기독교에서는 죽어져서 얻는 완생이다.
일상에서는 적들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다.
버려짐이란 또 다른 화두가 나온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3-3. 최종 승리에서 살아있는 완생
"나 자신의 인프라"를 키우는 인생의 길
미생에서 길이란...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실패, 좌절, 버려지고, 버리는 사회 생활에서의 미생은 본질적으로 완생을 만들지 아니한다.
(참고)
미생(未生)에서 완생(完生)으로 거듭나기
https://brunch.co.kr/@runrun/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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