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영성)날아 - 미생 OST으로 보는- 미생편

2019. 8. 22. 22:04로뎀나무/네번째

(세상영성)날아 - 미생 OST - 미생편
https://youtu.be/ZfGzXCUqlJg

* 개똥철학일 수도 있다.
* 시사하는바가 커서 정리하고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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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영성)날아 - 미생 OST으로 보는
- 미생편
https://yosiah.tistory.com/920
-완생편
https://yosiah.tistory.com/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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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란 것을 대하는,
남다른 직장인의 진지함과 절대적 선(?)을 잘 표현한 드라마 미생이다.

이 일 = 업을 사명으로 여기고 완수해 나아가는 삶.
그리고 그것은 삶을 이어가는, 누구나 돈을 벌어서 살아갈 수 밖에없는 절박한 직장 현실을 잘 담으낸 명작이다.

드라마에서 미생과 완생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리는 아직 다 미생이야. "
완생하지 못한 미생의 삶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거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다."

노력충으로 대변 될 수 있는
세. 상. 영. 성.
이것만 해도 절대적으로 도달할 수 없음에
이 세상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큰 공감과 갈채를 보낸다.

한마디로 현실을 너무도 잘 담아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도전이고, 아픔이다.

이러한 현상을 현실에서 존재하는데에 가지는 다음 문제로 설명할 수 있겠다.
기반을 잃어버린 문제.
존재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한 문제.

인생이 왜 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이기에 그렇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기반이 없는 구멍을 가졌지만, 이 현실이라는 구도 속에 파이팅을 외는 노래에서도 사람들은 눈물과 투지를 다시 자아낸다. 완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해 낼지,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상황과 환경을 함께 하는 이들과 연민과 서로의 격려로 힘을 얻는다.

모든 것이 무너져있고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질 않아 
까맣게 드리운 공기가 널 덮어 
눈을 뜰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결국 멀리 떠나버렸고 
서로 숨어 모두 보이질 않아 
차갑게 내뱉는 한숨이 널 덮어 
숨을 쉴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거기서 멈춰있지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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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의식 구도 속에서도.
투지와 불굴의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세상영성을 엿보게 된다.

구도적, 구성적인 열악함에도 현실에 도전하는 세상은 기독교에게 되묻는다고 생각한다.
너희의 구원을 이 현실에 보여 줘봐.

이런 면에서는 기독교가 많이 분발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너무 속상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미생, 완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생은 "완생"으로 여김받고 살아가는 삶에서 출발점부터 다르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완생 = 새로운 피조물 =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

존재적인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존재적 기반을 예수 그리스도 급으로 가진 삶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인가?

그리고 구원함을 받은 이후의 성화의 삶을 완생으로 여김받고 완생하도록 이끄신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존재적 기반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고,
존재적 목적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삶이 잡혀있다.
존재적 이유와 가치가 분명하여 흔들릴 일이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이라는 현실 공간에서
다 이루신 - 완생을 하셨다.
그 완생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 하나님 품으로 가신 삶이 었다는 것이다.

큰 화두를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존재적 기반을 상실한 시대에 존재적 가치를 일로써 동일시하여 가지려하고, 가질 수 밖에 없는 생존적 이유를 가지는 삶에서 미생할 수 밖에 없는 절망을 안고 살아간다.
서글플 수 밖에 없는 삶이기에...
그러나 그러한 삶의 네러티브 - 이야기 전체 상황에 공감과 응원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영성은 파이팅을 외치고 나아간다.

기독교는 반드시,
실존적 존재의 용기에 대한 바른 모습과
현실에 그 모습을 실현해 내야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다 이루셨다.
완생하신 것이다.
그리고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미생을 지나 완생의 삶으로 초대하셨다.
삶의 구원함이 완생에서 시작하도록, 존재적 기반을 확고히 해 주신 것이다.
삶의 용기는 용기를 가진다는 마음에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 기반이 탄탄하고 든든한데에서 나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반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 그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이 뒤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의 성취로 나아갈 것이다.
기독교는 세상영성에서 본받을 부분과 분발해야 하겠고,
세상에서는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조적인 모순이 아닌 놀라움 - 그 하나님의 계획 -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주기를 바란다.

(참고)
[존재의 용기] 용기를 상실한 이 시대를 통찰한다.
https://yosiah.tistory.com/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