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 (2004.11.07)

2012. 5. 29. 00:11로뎀나무/첫번째

나의 믿음 (2004.11.07)


(먼저 이 글은 제 자신에게 쓰는 글이 되기를 바라면서 썼습니다.)

 

지난 18년간의 믿음생활을 해온 나에게는, 믿음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이 믿음은 계속 날 따라 다닌 것만 같았고, 나는 그 울타리 안에서 놀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하고 명백한 믿음이 있어서 좋았고, 모든 것을 즐겁게 해주는 믿음이 좋았다.

 

하지만 좋은 나날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 것 같다. 중학교를 거치면서 잔꾀도 늘어나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냈다. 사실 질풍노도의 시절 때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대체 누구를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대답이 명확히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나는 헛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월(헛것을 잡은 것 같은 세월) 속에서 대학에 갔다. 물론 대입 수능 준비하면서, 성경을 정독했고, 기도도 꾸준히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찾는 준비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님, 지금은 사정상 지혜를 주시고, 밀어 주셔서 대학 들어가게 해 주세요. 대학가면 당신을 잘 알아 갈게요.' 그때에 왜 '알아간다' 라는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대학에 갔고, 알아가게 되었다.

 

대학 기독 동아리의 조장 형님으로부터 들은 예수 이야기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 들어봐 봐. 인간은 죄 된 몸에서부터 태어났어. 그 죄의 문제는 다른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죄 사하심으로 만 너의 죄가 용서되고, 네가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야."

 

나는 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용서받았고. 구원, 죄로부터의 내 영이 살아나는 구원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도 물론 단순한 위의 말 한마디로 이런 감격을 맛본 것은 아니었다. 대학 들어가서는 예수님을 '알아간다'고 해놓고도 일주일에 한번 조장 형님과의 성경공부도 예습도 안하고, 만날 때마다 논리 정연한 억지 질문으로 일관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 믿어져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을 얻고 성령이 아니시면 주를 주라 하지 못한다고, 나에게도 마음으로 믿어지는 날이 온 것이었다. 그 해가 98년도였고, 2학기부터는 제2성전 제1청년대학부( CAM) 에 출석하게 되었다. 1청년대학부에서는 좋은 간사님, 조장 형, 부조장 누나, 조원들로 믿음 안에서 서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알아갔다. 그야말로 좋은 교제를 풍성히 가졌다. 이때 구원의 확신을 공고히 다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가끔씩 나는 심한 다툼과 죄악에 빠질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미워지고,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내 모습에 괴로워하고 혼란스러워했었다. 그랬었던 나에게 2000년도 수련회는 다시 하나님의 크신 사랑('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을 깊이 알게 되었고,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내게 '구원받은, 깨끗해진 사람이 다시 더러워졌을 때에 내가 다시 깨끗해지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명쾌한 해답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죄를 짓는 육체는 그리스도 예수와 이미 십자가에 죽었고,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일 내가 또 죄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좌절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나의 생이 되었다.

 

그리고 2001년도에는 내 눈의 시야를 확 열게 하는 선교 훈련을 받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훈련은 내가 선교를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세계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하신다는 사실이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면 초등학교 5-6학년 때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지성전의 5-6학년들이 모두 모여서 오산리 금식 기도원에서 멋도 모르고 "주여! 주여!" 외쳤다. 그런데 왠 눈물이 그렇게도 나던지 눈물을 참으면서 눈물도 흘린 기억도 아련하고, 방언도 하고,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수련회 돌아온 3일간은 새로운 착한 초등학생으로 살아간 기억도 있다. 3일 후에는 본래 초등학생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믿음이 자라나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좋은 믿음이네', '나쁜 믿음이네' 라는 비교적인 관점의 생각은 갖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다시 내 자신에게도 그렇게 비교적인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이다.(비교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므로) 예수님은 주님께서 가르치고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하셨고, 우리의 목표점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믿음에 이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도 또 다른 문제와 믿어지지 않는(받아들이기 힘든)부분들도 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는 부분이다. 세상이 돌아가는데 못마땅함 등이나 기성세대까지 갈 것 없이 부모님에 대한 순종이 나에게는 참 부족하다. 사실 이 부분을 믿음의 관점에서는 얘기하는 것은 억지스럽게 끼워 맞추는 것 같지만, 나는 믿음의 관점에서 이 부분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의 인물이 못마땅하게 여길 환경에서 절대적인 순종을 보여준 것에서 지금의 나의 상황을 살펴보기 때문에 더더욱 믿음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주신 권위에 불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실 선한 일들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되므로......)

 

그래서 믿음, '믿는다.' 라는 것이 단순, 명확하게 모든 것에 적용되어 믿음으로 모든 것을 행할 것 같았는데...... 삶의 여러 부분에서 나는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나의 지난 믿음의 여정들이 잘 기술되어서 착착착 잘 올라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중간 중간의 침체기(슬럼프)도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생긴다고 말씀을 들었던 것,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 양육 받은 것, 그리고 나의 믿지 못하게 하는 의심들을 지우고 믿음의 확신을 위해 기도했던 것을 '나의 믿음'에 여정이 계속된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주위의 믿음의 사람들, 친구들, 친지, 가족들이 없었다면 이 글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단순히 믿기 위해 말씀보고, 기도하고, 믿음의 사람들이랑 교제할 것이다. 누군가 신문을 보는(세상일로 걱정할) 시간에 몇 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