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이야기 3 (2005.03.13)

2012. 5. 30. 01:02로뎀나무/첫번째

우리나라 이야기 - 시작하는 글 (2005.02.13)
https://yosiah.tistory.com/112

우리나라 이야기 – 1 (2005.02.27)
https://yosiah.tistory.com/113

우리나라 이야기 – 2 (200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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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글) 우리 나라 이야기 3 (200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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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2005.04.24) 
(우리나라 이야기 - 중간 이야기)
https://yosiah.tistory.com/118

우리나라 이야기 – 4 (2005.05.01)
https://yosiah.tistory.com/116

결코 뒤돌아 서지 않으리 (2006.01.03)
- 우리나라 이야기에 마지막 얘기
https://yosiah.tistory.com/117


우리 나라 이야기 세 번째, 우리 나라 역사상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려는 활발한 세계 무역 활동과 도자기 예술 사상 최고를 자랑하는 고려 상감청자로 우리 나라의 외국명인 꼬레아(코리아)를 세계에 알렸던 나라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이래, 혜종과 정종은 초기의 호족 세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호족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선에서 타협하며 정권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 7년 후, 개혁을 단행합니다. 956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공포합니다. 원래 양반이었던 노비의 해방을 내세운 이 법은 실은 호족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조치였습니다. 당시 수많은 노비들은 후삼국 전쟁 중에 포로 혹은 극빈자가 된 양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노비들은 호족의 농사일에 종사하거나 유사시 사병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왕권 약화, 조세 수입 감소, 국방력 약화를 가져와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한 지 2년 뒤, 958년에 과거제를 실시했습니다. 과거제는 호족 자제들을 관직에 기용하는 기존 인재 등용 체제를 벗어나 과거에 합격한 인재를 기용했습니다. 이로써 호족의 정치적 기반은 축소된 반면 왕권은 강화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안정된 왕권국가로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외세와 대결하게 됩니다. 고려 초에 동아시아는 남쪽의 송, 북방의 요, 그리고 동쪽의 고려, 이렇게 삼각 세력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 중 가장 공세적이었던 요는 송을 치기 전에 고려와의 관계를 정립하려 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복속되든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든지 해서, 어떻게든 요가 송을 칠 때 고려의 개입을 막아야 했습니다. 요는 연운 16주를 둘러싼 송과의 전투에서 대승한 뒤 고려에 침입합니다. 993년 요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서 봉산군을 점령하고 고려에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 신하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넘겨주자는 할지론을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이 곧 관철되는 듯이 보였지만, 서희는 요의 전략적 목표는 영토 획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송의 국교 단절, 고려와 요의 외교 관계 회복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요와 통교하고자 해도 여진족이 방해가 된다며 두 가지 요구 사항을 요청합니다. 두 가지 요청은 여진족을 내쫓아줄 것과 압록강 유역의 땅을 고려에 넘겨줘 통교할 길을 트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고려와의 싸움에 적극적인 의사가 없었던 요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압록강 이남의 280리 지역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줍니다. 그 대신, 고려가 송과 외교를 단절하고 요와 통교하는 조건의 화약을 맺었습니다. 홍화진,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로 일컬어지는 강동 6주 회복은 영토 확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략적 요충지로 이후 거란의 2(1010), 3(1019)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거점이 됩니다. 거란과의 30년 전쟁은 고려, 거란, 송 동아시아 3대국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맞아, 고려가 유연한 외교정책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능동적으로 대처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1126년 이자겸의 반란 이후 고려 문벌귀족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이씨 집안의 딸 셋이 모두 11대 문종에게 시집가면서, 이자겸 집안은 고려왕조의 대표적인 외척이 되었습니다. 이자겸은 이자겸의 둘째 딸이 16대 예종의 왕비가 되면서 유력한 외척이 됩니다. 후에 이자겸은 17대 인종에게 셋째, 넷째 딸을 시집 보내 왕비가 되게 하면서 인종의 왕권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인종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고려는 이러한 상위지배 계층의 권력의 아귀 다툼만 있던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잠시 고려 상감청자와 개성상인의 활약에 눈길을 돌려보겠습니다. 고려 상감청자는 푸른 바탕에 검붉은 색이 은은하게 비치는 신비의 색감이 돋보이는 청자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비색을 내는 상감기법은 12세기 후반부터 나왔는데 도공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창조한 작품입니다. 상감청자의 비취색은 아직도 복원할 수 없는 명작 기술로 꼽히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는 대외교역을 활발히 했던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합니다. 더욱이 고려의 창업자 왕건은 원래 무역에 종사하던 개성상인의 후예라 개경을 건설하면서 수도 중심에 대규모 상가를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개성 부근 예성강변의 벽란도는 고려의 대외교역이 이루어진 국제 무역항이었습니다. 이때의 개성상인들이 고려 때 명성을 날리던 무역인들 입니다. 이들은 송나라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고, , , , 일본 등지의 상인들과도 무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1024년과 1040년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이 와서 무역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직접 교역을 한 것은 적습니다. 하지만 대식국 상인들이 송상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하면서 우리나라는 꼬레아(Corea)란 이름으로 서방에 알려집니다.

 

다시 고려 중기 정권의 이야기로 돌아와...... 이자겸의 난 이후, 신진세력 묘청의 난(1135)이 이어지고 1170년 군사쿠데타로 무신정권이 세워집니다. 이후 무신정권은 정중부에서 경대승, 이의민으로 불안하게 정권이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이의민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60년간의 확고한 최씨 무신정권이 서게 됩니다. 무신정권은 자신의 통치기반을 강화하는 데만 열 올려서 무력을 바탕으로 한 도방을 설치합니다. 그리하여 민중항쟁을 진압하고, 집정기관으로 교정도감을 설치해 이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확고해진 무신정권시대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더욱 무너져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토지 겸병 때문에 수확해도 대부분 수탈당하는 상황에서 고향을 등지고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습니다.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서 하극상의 풍조가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하였던 것은 '만적의 난'입니다. 1198(최충헌 무신집권 2) 최충헌의 노비 만적은 개경에 다른 노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봉기의 불을 댕겼습니다. "정중부의 난 이후 고관대작이 천민과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재상이라고 무슨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만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노비들만이 뼈와 근육을 혹사당하고 채찍을 맞으며 곤욕을 당하라는 법이 있겠는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자 자기 주인을 죽이자. 그리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나라에 천민을 없게 하면 우리도 공경장상이 될 수 있다!" 만적이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민해방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주인인 무신들의 쿠데타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천민이자 깡패(무뢰배)로 불리던 이의민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최충헌 역시 자신의 상관인 이의민을 죽이고 명종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감행해 권력을 획득했던 것이었습니다. 만적의 난을 전후해 수십 차례 민중봉기가 있었고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해체되어가는 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1231~1259년 동안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이런 때에 무신정권은 팔만대장경 판각사업(1236~1256)을 진행해, 부처의 도움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기를 염원했습니다. 무신정권은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조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 외에,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백성을 단합시키고 정권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바탕은 당시 불교계의 독자적인 무력기반인 승병조직을 대몽항쟁에 끌어들이는 명분이 됩니다. 하여튼 대장경 판각사업은 불심이 강했던 고려인들의 참여를 끌어내 16년간의 전쟁 중에 조판작업을 힘들게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1259년 고려는 원과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을 마감했습니다. 고려의 패배였습니다. 고려는 이때부터 대원자주화에 성공하는 1356년까지 정동행성(원의 내정간섭기구)을 통해 원의 간섭을 받습니다.

 

1351년 원 간섭기의 막바지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권문세족의 전횡이 극에 달한 시기입니다. 그간 정권은 무신정권의 실력자와 친원파에게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두 가지 개혁을 단행합니다. 하나는 왕권강화를 통한 내부개혁으로 권문세족의 전횡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근 100년간 지속된 원의 간섭으로부터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전격적인 개혁은 반개혁세력의 반발과 홍건적의 발흥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조일신의 정변, 찬성사 김용의 반란으로 많은 신료들이 목숨을 잃고 공민왕조차 시해될 뻔했습니다. 원은 공민왕의 개혁에 위협을 느껴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덕흥군의 세력을 제압합니다. 하지만 공민왕에게 이들 무장들 역시 권문세족의 한 부류였기에 공민왕의 개혁은 약화되고 맙니다.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신돈이란 승려로 하여금 개혁을 추진하게 하지만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역모 죄로 몰아 처형당하게 합니다.

 

"요즘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보다 크기도 하고, ()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마지기의 땅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8~9할을 내야 한다." <고려사>가 기록하는 고려말의 사회상입니다. 이로써 공민왕의 마지막 개혁도 물거품이 되고, 1388년 이성계가 라오둥정벌군을 되돌려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이성계가 왕위를 선양 받는 것으로 고려왕조의 멸망을 미리 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