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야기 – 2 (2005.03.06)

2012. 5. 30. 01:01로뎀나무/첫번째

우리나라 이야기 - 시작하는 글 (2005.02.13)
https://yosiah.tistory.com/112

우리나라 이야기 – 1 (2005.02.27)
https://yosiah.tistory.com/113

(현재글) 우리나라 이야기 – 2 (200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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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이야기 3 (200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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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2005.04.24) 
(우리나라 이야기 - 중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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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야기 – 4 (2005.05.01)
https://yosiah.tistory.com/116

결코 뒤돌아 서지 않으리 (2006.01.03)
- 우리나라 이야기에 마지막 얘기
https://yosiah.tistory.com/117


우리나라 이야기 두 번째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건국까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신라의 삼국통일(676)부터 고려 건국(963)까지는 260년이라는 세월이 걸립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해 발흥한 발해, 몰락해 가는 신라와 그 내부에서 발흥하는 후백제와 후고구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고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일본의 식민역사관으로 인해 묻혀진 동아시아의 역사로만 전해오다가 1970~80년대 민족주의 역사관이 되살아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발해를 공부한 우리 세대들은 발해를 쉽게 우리나라 역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발해를 인정하는 역사관이 정착된 지는 겨우 20~30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당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부터 고구려 유민들은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합니다. 그러던 중에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길림성 부근) 기슭에 진국(이후 나라이름을 발해로 고침)을 세웁니다.

 

발해는 고왕(대조영) 때에 랴오둥 지역을 비롯해,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2대 무왕 때는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킵니다. 그리하여 그 영토가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와 송화강 유역에서부터 한반도 동북부, 연해주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세력 확장과 함께 당, 일본, 신라 등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경제력까지 강해져 '해동성국' 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10세기에 들어서 발해는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외부적으로는 신흥세력 거란이 일어나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내부 분열이 지속된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략 앞에 단 사흘 만에 무너집니다. 그리하여 발해 멸망 후에 만주 벌판은 우리 나라 역사에서 추억의 땅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통일 이후의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고려 이야기는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것 같아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대를 풍미한 인물의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삼국의 전란 속에서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이자 불교사상 확립에도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원효(617~686)입니다. 원효가 30대에 선진 불교를 배우려고 당으로 유학 가는 길에 어느 날 밤이 늦어 한 토굴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는 자다가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었는데, 마침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어 시원하게 마셨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그가 깨고 보니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더러운 물이 아니겠습니까! 깨달음을 얻고 해탈한 원효는 유학을 단념하고 저잣거리에서 천민과 농민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원효의 포교는 '무애'(無碍: 집착 없는 자유)라는 이름의 도구를 만들고 무애가를 만들어 퍼트렸습니다. 그는 무애가에 무애춤도 곁들여 추며,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에게 포교활동을 했습니다. 원효의 포교활동은 백제가 멸망한 660년부터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 676년까지의 전란에 지쳐 있는 일반 민중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서 중앙 귀족들간의 권력싸움은 치열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구축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호족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현상 가운데 귀족들은 녹읍을 토대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을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호족 세력이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면서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으로 그 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를 지배했습니다. 한편, 골품제로 출세가 제한된 젊은이들은 당으로 가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개혁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통일신라 말기의 이야기는 장보고, 최치원, 궁예, 견훤, 왕건의 얘기로 대표됩니다.

 

장보고(800~846)는 유능했지만 미천한 출신 때문에 강력한 신분제인 골품제에 막혀 출세가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청년 장보고는 당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군공을 세워 당 무령군의 중소장이란 고위직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인들이 중국해적들에게 납치, 매매되는 현실을 타개하려고 그는 신라로 귀국하게 됩니다. 당시에 당의 통제력 부족과 신라의 치안능력 부재로 신라의 서남해안은 무법지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대표적으로 통일신라 말기 최대의 난으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남 822) 828,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해군기지 건설을 건의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합니다. 하지만 국가 지원이 없어, 그는 민병대를 조직해 해적소탕에 나섭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공적으로 해상권을 장악합니다. 장보고의 해적소탕으로 신라인들은 편안하게 해상활동을 하게 되었고, 장보고 또한 활발한 교역을 전개해 상당한 재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로써 청해진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갖춘 기지로 부상했고, 장보고는 유력한 정치세력이 됩니다.

 

하지만 치열한 왕위쟁탈전(765~838, 7차례의 귀족란, 3왕이 시해됨)을 벌이던 중앙귀족들에게 장보고 세력이 눈에 들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의 왕위계승 분쟁에서 실패한 김우징(후일 신문왕)이 청해진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습니다. 김우징은 '구국'을 명분으로 장보고를 왕위계승 싸움에 끌어들였습니다. 장보고의 군사력으로 김우징은 신무왕에 오르게 되고, 장보고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감의군사란 고위직에 오르게 됩니다. 신무왕은 즉위 1년 만에 죽게 되고, 그 뒤를 이은 문성왕 역시 장보고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해서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을 맡깁니다. 그러나 미천한 출신의 장보고가 출세하자 골품제에 찌든 신라의 귀족들은 당연히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장보고는 '구국의 영웅'에서 '반란자' 로 낙인 찍혀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오르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학문에 힘써라"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12세의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당에 유학가는 최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최치원(857~919)6두품 출신에게는 한정된 출세 길을, 당에서의 과거급제로 열어보려고 당으로 유학 갑니다. 그는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는' 노력 끝에 외국인을 위해 설치된 빈공과에 당당히 합격합니다. 그 뒤 당의 율수현에서 현위라는 말단 관직으로 일하고, 황소의 난 때에는 토벌군에 종사하면서 '격황소서' 격문 같은 유명한 명문도 썼지만 그는 중국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고 1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그는 태인, 서산, 당진의 태수 등 외직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당시 대국인 당에서 활동했던 그가 소국 신라에서 외직을 떠돌아야 했으니 그의 좌절감은 극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당에서 지은 <계원필경>을 헌강왕에게 바치고, 국정개혁안 <시무 10여 조>를 올리기도 했지만 국정에 반영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에 가서 배워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뜻을 행하려 했으나, 세상이 말세가 되어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용납되지 못했다"  <삼국사기>는 최치원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야망을 버리고 해인사에 은거하다 결국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궁예(? ~918)는 버려진 신라 왕족으로 도둑의 무리 속에서 초기 세력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제대로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는 최하층 유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일개 도둑에서 강인한 군인으로 결집시킵니다.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궁예는 경기, 강원, 충청일대 실력자들의 대부분을 정복하거나 귀순시켜서 통일신라 2/3 세력을 확보합니다.(910) 하지만 궁예는 뒤늦게 합류한 송악 등지의 호족 엘리트층과 기존 도적층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신진세력에 패배하게 됩니다. (왕건의 쿠데타 918)

 

견훤(867~936)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군에 입대합니다. 당시는 통일신라 말기로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견훤과 같은 야심을 가진 청년들은 희망이 없는 중앙에서의 출세를 좇는 대신, 무리를 모아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 900년에 완산주(전주)를 쳐서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합니다. 실로 935년 장자 신검의 정변을 맞을 때까지 후고구려와 후삼국 통일을 향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그는 6두품의 엘리트를 기용했고, 서남해안을 이용해 거란, 일본과 외교했고, 둔전제(군대가 군용식량을 직접 경작해 조달)와 담로제(지방에 왕족을 파견)를 시행해 내부역량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내부분열로 인해 장자 신검이 모반을 일으켜, 유폐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이듬해 그는 왕건과 함께 아들과 전투를 벌여서 스스로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립니다.

 

왕건은 본래 송악지방의 호족으로서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성장한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후 궁예의 신하가 되어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습니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왕건은 단 하루의 쿠데타로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궁예도 별다른 손을 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게 되는데... 쿠데타 당시 41세였던 왕건은 이미 10여 년 전인 30세 때 금탑에 올라가 왕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대권에 야망을 가졌던 왕건은 내직보다는 전장을 돌며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궁궐에 신라 6두품 계열을 주류로 한 실무관료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심어 놓았습니다. 전문관료진은 초기 후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승려, 무인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918년에는 '궁예의 시대는 가고, 왕건이 천명을 받았다'는 왕건 천명설을 철원성 내에 퍼뜨리는 공작도 펼칩니다. 이렇듯 왕건의 준비된 쿠데타로 고려가 건국됩니다.

 

왕건은 포용과 통합에 뛰어난 지도자로 발해가 멸망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포용합니다. 그리고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신라와는 적극적으로 우호 협력하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폅니다.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하고, (935) 후백제는 내분이 일어나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이고(935)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