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야기 – 4 (2005.05.01)

2012. 5. 30. 01:05로뎀나무/첫번째

우리나라 이야기 - 시작하는 글 (2005.02.13)
https://yosiah.tistory.com/112

우리나라 이야기 – 1 (2005.02.27)
https://yosiah.tistory.com/113

우리나라 이야기 – 2 (2005.03.06)
https://yosiah.tistory.com/114

우리 나라 이야기 3 (2005.03.13)
https://yosiah.tistory.com/115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2005.04.24) 
(우리나라 이야기 - 중간 이야기)
https://yosiah.tistory.com/118

(현재글) 우리나라 이야기 – 4 (2005.05.01)
https://yosiah.tistory.com/116

결코 뒤돌아 서지 않으리 (2006.01.03)
- 우리나라 이야기에 마지막 얘기
https://yosiah.tistory.com/117


1388 2월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에 엉뚱한 통고를 합니다. 원간섭기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철원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땅으로 하겠다는 일방적인 통고였습니다. 철원 이북땅은 1356년에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되찾은 곳인데 그곳을 달라니...... 고려 중앙집권세력으로 대표되는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와의 정면승부로 랴오둥정벌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신진관료 세력으로 대표되는 이성계는 명과 외교적 교섭을 통해 반원친명 외교 노선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고려 중앙집권세력은 출병을 결정하게 되고,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는 정벌군을 조직합니다. 1388년 4월 18 정벌군은 평양을 떠나 5 7일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이성계는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합니다. 강물이 불어 압록강을 건너기도 힘들었는데, 랴오둥까지 가려면 큰 강을 몇 차례나 더 건너야 하고 군량미도 다 떨어져 회군해야 함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우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5 21일 마지막으로 최영에게 철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5 22일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시작합니다. 6 1일 개경에 도착한 정벌군은 최영군 1000여명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뒤 우왕과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왕위에 올리게 됩니다. 그로부터 4, 이성계가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아 무혈 역성혁명(세습되는 통치자의 성을 바꾸어 천명을 혁신한다)을 이루기까지 이색, 정몽주 등의 온건개혁파와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개혁파 사이에 목숨 건 권력투쟁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왕조의 이야기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우기까지는 새로운 왕조에 대한 청사진과 계획이 필요합니다. 바로 정도전(1342~1398)이 조선왕조를 계획했던 설계자였습니다. 위화도 회군, 고려 온건개혁세력과의 정치 투쟁 그리고 조선건국까지 정도전은 실질적으로 조선왕조를 계획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조선왕조의 청사진으로 잡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군왕이 자의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도록 통치규범을 법전으로 제도화했습니다. 또한 '경제문감'을 저술해, 부패했던 고려의 정치조직을 탈바꿈시키기 위해 조선의 정치조직은 언론과 감찰기능을 강화하게 됩니다. 그는 조선왕조의 국호인 '조선'을 개국시조인 고조선에서 따옴으로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수도 한양을 4대문(숭례문, 숙정문, 흥인문, 돈의문) 4소문으로 설계하고 한양의 행정조직을 5 49방으로 조직합니다. 또한 토지제도를 개편하여 고려시대에 부정 축재한 권력자의 땅을 농민에게 되돌려주도록 합니다. 인사제도는 고려시대 권문세족의 자제가 등용되는 폐단을 막고 능력 위주로 신진관료를 뽑는 과거제도로 새롭게 정비됩니다. 교육진흥을 위한 교육제도도 갖추었습니다. 군사 측면에서도 고려 말의 권력투쟁 때문에 난립해 있던 사병을 혁파해 조선군으로 통합하고 새롭게 대오를 정비하는 진법으로 제도를 정비합니다. 하지만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향으로 꿈꾼 정도전은 강력한 군주제를 지향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나라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인물 중에 세종대왕께서 계시지요. 세종(1397~1450)은 태조, 정종, 태종 다음의 4대왕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성군으로 숭앙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삶은 인간적으로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외척이 세도를 부려 왕권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해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후의 4형제를 모두 역모죄로 죽입니다. 그리고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으로 있던 심온 또한 역모죄로 죽입니다. 이 일들을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0대 후반에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즉위하자 마자 세 차례의 국상을 연달아 치르게 됩니다. 즉위한 해에는 큰아버지 정종이 죽고, 정종의 3년 상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 아버지가 잇달아 죽어서 7년간을 상중에 있게 됩니다. 7년의 세월 동안 세종은 술과 기름진 고기를 멀리했고, 100일 넘게 곡을 했으며, 36차례 넘는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분명히 과로와 스트레스로 건강이 좋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18시간 이상 업무를 보고, 학자들과 토론하며, 공부하는 등 자신의 일과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세종은 20대부터 두통과 이질을 앓았고, 30대에는 풍병과 종기로 고생을 했습니다. 40대에는 백내장, 당뇨병, 전립선염, 각기병, 고혈압 등 온갖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은 맏딸 정소공주,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일곱째 평원대군이 요절함으로써 가정 내에서도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평탄치 못한 삶 속에서도 세종은 국정 운영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원만하고 조화로운 스타일로 신하들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도출해내는 민주적인 리더십으로 국정을 폈습니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그의 업적과 그가 다스리던 시대에 얻어진 성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적 측면에서 그는 왕에게 집중된 국사를 의정부로 이관하고 언론기관의 기능을 강화하며 황희, 맹사성 등의 명재상을 등용하였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집현전을 설치, 운영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농사직설 등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편찬하는 사업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는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화기 개발에 힘써 군사력 증진에 힘을 쓰고, 김종서의 6진 개척과 최윤직의 4군 설치로 북방의 영토를 확립하게 됩니다. 또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합니다. 과학 분야에서도 장영실이 천문학 관측기기와 측우기, 자격루 등을 개발하였고, 예술 분야에서는 박연이 아악을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