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30. 00:58ㆍ로뎀나무/첫번째
우리나라 이야기 - 시작하는 글 (200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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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글) 우리나라 이야기 – 1 (200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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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야기 – 2 (200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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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이야기 3 (200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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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2005.04.24) (우리나라 이야기 - 중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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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야기 – 4 (200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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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뒤돌아 서지 않으리 (2006.01.03)
- 우리나라 이야기에 마지막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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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야기 첫 번째로 고조선 때부터 삼국통일 때까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고조선으로 시작하는 우리나라의 기원은 익히 알려진 단군설화에 잘 나타납니다.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서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환웅은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100일 후에 곰만이 약속을 지켜 여자가 되었습니다. 환웅은 여자가 된 곰과 결혼해 단군 왕검을 낳았습니다. 단군 왕검은 평양을 수도로 삼아 고조선을 세웠습니다.(기원전 2333년)
고조선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도구가 발전되는 중에 고대국가로 세워졌습니다. 역사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단군설화에서 환웅은 우월한 문화를 가진 타 지역 이주민이며, 여자가 된 곰은 이주민과 화합한 곰을 섬긴 토착부족입니다. 인간이 되는데 실패한 호랑이는 새롭게 진출한 세력에 대항하다 실패한 호랑이를 섬기는 토착부족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통합 고대국가로 세워진 고조선은 이후 1500년간 발흥하고 역사는 삼국시대로 접어듭니다.
고구려는 부여의 지배계층 주몽이 건국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기원전 37년)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 통일의 기반을 다졌고, 율령을 반포하여 각 부족에 대한 국왕의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성장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확립된 국가체제로 정복 전쟁에 나설 수 있었으며, 22년의 재위기간 동안 서쪽으로는 랴오둥 반도까지 서북쪽으로는 심양을 넘어 몽고 땅까지 북쪽으로는 송화강 언저리의 넓은 평야를 차지하고 동북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아래 지역까지 차지하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두 번째 부인에 아들 온조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기원전 18년) 백제는 활발한 대외진출로 중국, 일본과 교류했습니다. 백제는 중국에 백제군 또는 진평현이라는 군현을 거점으로 무역을 했고, 일본에 아직기와 왕인이 파견되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또 그들은 일본 태자의 스승과 사관이 되었습니다. 백제 성왕 때에는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파견하여 불교를 전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규모가 작은 6촌 연맹의 부족국가로 시작됩니다.(박혁거세 설화) 삼국 가운데 가장 발전이 늦었던 신라는 6세기에 들어서 지증왕이 국호를 신라로 고치고 왕호를 왕으로 하고 지방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국가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법흥왕 때에 우산국(울릉도)과 금관가야를 정복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지방제도를 제정하는 등 왕권국가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법흥왕의 왕권강화는, 신라의 국교를 불교로 공인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차돈의 순교(?)가 큰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이차돈의 순교'라는 계기의 절대성을 이해하려면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당시 신라는 12개 소국의 연합국가로 이뤄졌으며, 그 연합 국가의 정치를 운영하는 귀족회의인 화백에서 국가의 주요 사항을 결정할 정도로 귀족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지사 왕의 권한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전 국가적 사상체계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바로 불교였습니다. 그런데 귀족들에게 불교란 자신들의 부족신앙에 근거한 하층민 지배의 정당성을 허무는 종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귀족들은 불교를 반대했었고, 그에 비해 법흥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를 절실히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22살의 미관말직 이차돈은 "제 목숨을 바쳐서 부처가 번성하고 왕께서 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법흥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순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법흥왕과의 밀약으로 이차돈이 죽임을 당하면서 불교가 공인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삼국의 역사는 삼국전쟁을 겪게 됩니다. 삼국 전쟁사는 간략히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는 활발한 대외 교류를 가졌지만 중국 대륙에 새롭게 등장한 당의 힘을 읽지 못하고 나당연합군에 무너지게 됩니다. 여기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인상을 남기는데 그런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웅진성을 수비하는 왕자를 의심해서 웅진성을 내어준, 지배층의 내부 분열과 나당연합군에 대항할 대비책을 내놓은 충신을 죽이는 실정 등 내부적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중국이 수 나라로 통일된 시기에도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수 나라와 정면 격돌을 했습니다. 수 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을지문덕 장군이 세운 살수대첩과 같은 통쾌한 승전으로 수 나라를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후 당나라와의 전투에서도 고구려는 패배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강한 전투력을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666년에 최고 실권자인 연개소문이 그의 후계자 삼형제에게 "너희들은 물과 물고기처럼 화목하게 지내라. 벼슬을 두고 다투지 말아라" 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삼형제는 권력다툼을 벌인 끝에 3년이 못 되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배층 내부의 통합력을 극대화하고 성장하는 젊은 국가로서 국가구성원들의 일치단결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전무퇴, 교우이신' 같은 세속 5계는 화랑만이 아니라 당시 신라 남자들은 누구나 지켜야 할 계율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제정세를 적절하게 이용해서 당을 끌어들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당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 통일신라 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전쟁 승리는 단지 당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저력이 밑받침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룻밤에 읽은 한국사' 발췌- 고등학교 국사 고교사 연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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